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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뜨거워” 울부짖던 ‘네이팜탄 소녀’…비극 재현된 우크라에 남긴 말은

류지미 2022. 6. 9. 19:40

“너무 뜨거워” 울부짖던 ‘네이팜탄 소녀’…비극 재현된 우크라에 남긴 말은

  • 동아일보
  • 이채완 기자
  • 입력2022.06.09 16:31최종수정2022.06.09 16:43

지난달 11일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네이팜탄 소녀’ 사진을 선사하기 위해 로마 바티칸을 찾은 닉 우트(가운데)와 킴푹(왼쪽). 바티칸=AP 뉴시스

 

1972년 6월 8일. 남베트남 작은 마을에 살던 소녀의 삶이 송두리째 뒤바뀌었다. 소녀는 마을 공터에서 사촌들과 줄넘기를 하고 있었다. 한순간 귀청이 터질 듯한 폭발음이 들려오더니 끔찍한 화상과 고통이 찾아왔다. 소녀는 아홉 살이었다.

6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베트남 전쟁 참상의 상징이 된 사진 ‘네이팜탄 소녀’의 주인공 판티 킴푹(59)의 글 ‘50년이 흘렀습니다. 저는 더 이상 네이팜탄 소녀가 아닙니다’를 실었다.

 

킴푹은 북베트남군과 월남군이 교전을 벌이던 베트남 사이공(현 호치민) 짱방 지역 출신이다. 농장과 레스토랑을 운영하던 부모님 품에서 자란 웃음 많던 아이였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됐고 마을에 네이팜탄이 떨어졌다. 기고에서 킴푹은 극심한 고통 때문에 “그날의 기억은 생생하지 않다”면서도 “너무 뜨거워! 너무 뜨거워!”라고 소리쳤던 기억은 희미하게 남아있다고 회고했다.

 

1972년 6월 8일 베트남 전쟁 당시 AP통신 사진기자 닉 우트가 촬영한 사진. 사진 속 벌거벗은 소녀가 판티 킴푹이다. 원제 ‘전쟁의 공포’ 대신 ‘네이팜탄 소녀’로 더 유명해진 이 사진은 이듬해 퓰리처상을 받았다.

 


AP통신 종군 사진기자였던 닉 우트(71)는 그날 네이팜탄에 불붙은 옷을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울부짖으며 1번 도로를 달려가던 킴푹을 사진에 담았다. 다음날 이 사진은 미국을 비롯한 주요 국가 신문 1면에 실렸다. 원제 ‘전쟁의 공포’ 대신 ‘네이팜탄 소녀’로 더 유명해진 이 사진은 베트남 전쟁을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사진에 속했다.

킴푹은 “닉이 찍은 그 사진은 내 인생을 영원히 바꿨다”고 말했다. 사진을 찍은 우트는 카메라를 내려놓고 달려가 물에 적신 담요로 킴푹을 감싸 인근 병원으로 데려갔다. 킴푹은 전신에 화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목숨을 부지했다.

킴푹은 “어렸을 땐 그 사진과 우트를 원망했다”고 고백했다. 벌거벗은 자신의 모습에 수치심을 느꼈다. 자라면서는 화상이 남긴 만성적인 고통보다 주위에서 쏟아지는 연민의 시선을 더 고통스러워했다. 1980년대 들어 그는 세계 각국 언론으로부터 전쟁의 참상을 얘기해 달라는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 킴푹은 “사진은 순간을 포착한다. 그러나 사진 속 사람들은 어떻게든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닉 우트(왼쪽)와 킴푹이 6일 미국 뉴욕 AP통신 사진도서관에서 만나 ‘네이팜탄 소녀’ 원본을 들어보이고 있다. 두 사람은 사진 촬영 50주년 기념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뉴욕을 찾았다. 뉴욕=AP 뉴시스

 


1992년 캐나다로 망명한 킴푹은 전쟁의 비극을 받아들이고 전쟁 피해자를 돕는 사명을 찾았다. 남편과 친구들 도움으로 ‘킴 국제재단’을 만들어 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무고한 희생자인 아이들을 치료하고 심리적으로 위안을 주기 시작했다.

킴푹은 “전쟁으로 평생을 살던 마을과 집이 파괴되고 가족이 죽고 거리에 누워있는 무고한 시민들을 보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안다”면서 “전쟁의 참상은 내 몸에 아직도 남아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이 상처에서 벗어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말했다.

그는 “슬프게도 이 비극은 오늘날 우크라이나에서도 재현되고 있다”며 “인간은 언제든 악을 행할 수 있다. 그럼에도 평화와 사랑, 희망과 용서가 어떤 무기보다 강하다고 믿는다”고 글을 맺었다.

이채완 기자 chaewa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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