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Human Geography

정율성( 郑律成, 鄭律成, Zhèng Lǜchéng, 정뤼청)

류지미 2022. 8. 9. 20:45

郑律成

조선 의열단인 정율성(郑律成)은 연안에서 연안송을 지었다. 연안의 중심지에 있는 중앙대례당에서 군인과 민간인들을위한 음악회가 열렸는데 이자리엔 모택동도 함께 했다. 연안송은 연안의 명물 보탑산에 걸린 노을을 노래하는 서정적인 노랫말로 시작된다. 이날 이곡을 발표할 때의 노래 제목은 연안의 노래였다. 그런데 이 연안의 노래가 항일과 혁명으로 상징되는 연안정신을 잘 표현한 노래라고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평가하면서 연안송으로 제목이 바뀌었다

<연안송>
보탑산 봉우리에 노을 불타오르고
연하강 물결위에 달빛흐르네
봄바람 들판으로 솔솔불어치고
산과산 철벽을 이루었네
아,연안!
장엄하고 웅대한도시!
항전의노래 곳곳에 울린다
아!, 연안!

"누가 뭐라해도 당시 연안은 항일과혁명의 성지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연안을 수많은 중국인들에게 알리는 노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연안과 연안정신을 중국인들에게 알리는노래를만들고 싶었다" 정율성

 

정율성( 郑律成, 鄭律成, 병음: Zhèng Lǜchéng 정뤼청, 1914년 7월 7일 ~ 1976년 12월 7일)은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출생한 중화인민공화국 국가( 중국 인민 해방군가) 작곡가로 본명은 정부은(鄭富恩)이다.

 

1914년광주군 효천면 양림리 (현 양림동 79번지)에서 한학자 정해업(鄭海業)과 지방 명문가의 딸인 최영온(崔英溫) 사이의 5남5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이들 형제자매 중 5명이 요절해 4남1녀가 됐다. 정율성의 호적 이름은 '부은'이었으나 '구모(龜模)'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5남5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이들 형제자매 중 5명이 요절해 4남1녀가 됐다.

 

부친 정해업은 한학을 배운 지식인으로 전라도 관찰부 공방서기직, 대한협회 광주지회 회원, 광주 지역 신간회 간사, 광주 수피아여고 교직에 있었던 기록이 있으며, 모든 자녀를 항일 투쟁을 위해 중국으로 보낼만큼 민족정신이 투철했다. 정율성은 큰 외삼촌인 최흥종 목사의 집에서 축음기를 통해 음악을 듣고 피아노를 치며 놀았고, 그가 활동하던 광주YMCA, 양림교회, 양림동 선교사촌을 통해 서양음악을 접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정율성의 작은 외삼촌은 최영욱 박사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과 캐나다에서 수학한 후 광주 제중원 원장을 지냈으며 미군정 하에서 초대 전라남도 지사를 지냈다. 최영욱 박사의 아내이자 한국YWCA 설립자 중 한 명인 김필례(金弼禮)는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일하며 교회를 빌려 때때로 음악회를 여는 등 정율성은 외가의 영향으로 음악에 친숙한 환경 속에서 자랐다.

 

정율성은 1917년 화순군 능주로 이주, 1922년에 능주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이듬해 광주로 다시 이주하였다. 그는 1928년 광주 숭일소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1929년 3월 5년제 전주신흥학교에 입학하였고, 합창단에 들어가 '내고향', '쪼각달', '고기잡이', '까투리타령' 등의 노래를 지도하였다.

 

1933년에 정율성의 셋째 형 정의은이 중국 난징에 있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서 2기 학생을 모집하기 위해 광주에 방문하자, 그는 4학년 1학기인 1933년 전주신흥학교를 중퇴하고 누나 정봉은과 함께 목포에서 평안환(平安丸)을 타고 부산과 일본 나가사키를 경유하여 5월 13일 상하이 푸동 항에 도착하였다. 정율성은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 의열단에 가입했다.

 

(*2008년 3월 13일. 전주신흥중학교가 정율성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하였다.총동문회는 2019년 1월 28일 정율성에게 자랑스런 신흥인상을 수여하였다.)

 

그는 의열단이 부여한 비밀 업무로 난징(南京)의 고루(鼓樓) 전화국에서 일본군의 정보를 수집하는 활동을 했으며, 신분 은폐를 겸하여 상하이를 오가며 소련 레닌그라드음악원 출신 여교수 크리노와(Krenowa)에게 성악, 작곡, 피아노, 바이올린 등을 배웠다. 정율성이 정식으로 음악을 배운 시기는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며, 이 시기에 어릴적 이름인 '부은(富恩)' 대신에 '선율(旋律)'로써 '성공(成功)'하겠다는 의미에서 '율성(律成)'으로 개명했다.

 

1936년 5월에 중국의 좌파 청년들이 참여하던 '오월문예사(五月文藝社)' 창립 대회에서 정율성은 추취도(鄒趣濤)의 시를 바탕으로 작곡한 그의 처녀작 《오월의 노래》(五月之歌)을 만돌린을 연주하며 직접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1937년 10월 옌안(延安)으로 이주하여 루쉰예술학원(魯迅藝術學院), 중국인민항일군사정치대학(中国人民抗日军事政治大学) 등에서 학습을 했다. 정율성은 1939년 1월에 중국 공산당의 가입하여 문예오락 일을 맡았으며, 《팔로군행진곡》을 포함하여 8곡으로 구성된 '팔로군 대합창(八路軍大合唱)'을 작곡하였다. '팔로군행진곡'은 당시 팔로군에서 널리 애창되었으며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채택되었다.

 

정율성은 옌안에서 중국 공산당에 소속되어 활동하며 정설송(중국어 정체자: 丁雪松 딩쉐송)을 만나 1941년 팔로군이 주둔하던 동굴에서 결혼하였다. 정설송은 항일운동가로 국무원 외사판공실 비서장, 대외우호협회 부회장을 거쳐 중국 여성으로는 최초로 네덜란드와 덴마크 주재 대사를 지냈으며 초대 총리인 저우언라이의 양녀이기도 하다.

 

1942년에는 옌안을 떠나 조선 혁명군 정학교에서 음악장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그는 '유격전가', '처녀 적녀성', '조선 의용군 행진곡', '연안송' 등 항일성이 짙은 노래를 작곡하여 명성을 얻었다.

 

 

정율성은 1945년 해방이 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귀국해 북한의 황해도 해주에서 황해도당위원회 선전부장으로 취임했으며 음악전문학교를 창설하고 음악 인재를 양성하였다..1946년 2월에는 부부 동반으로 북한 김일성을 대면했다. 1947년 봄에는 평양으로 이주해 조선인민군 구락부의 부장을 지냈고 조선인민군 협주단을 창설해 초대 단장으로 취임, 전국 순회 공연을 했다

 

 1949년에는 조선음악대학 작곡부부장으로 임명되어,  ‘조선해방행진곡’과 ‘조선인민군 행진곡《두만강》, 《동해어부》등을 작곡했다. ‘조선인민군 행진곡’은 훗날 ‘조선인민군가’가 되었다.  그는  중국과 북한 두 나라의 군가를 작곡한 세계에서 보기 드문 기록을 남겼다.

 

 

1950년 6·25 발발 후 정율성은 개전 초기 아내와 서울까지 내려왔다가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저우언라이의 요구로 김일성은 정율성을 중국으로 파견, 그해 10월 중국으로 돌아갔다가  이듬해 북경예술극원 합창대 부대장이 되었다. 

 

정율성은 1952년부터 문화대혁명이 시작되기 전인 1963년까지 조선족이 거주한 연변은 물론 쓰촨(四川), 헤이룽장(黑龍江), 저장(浙江), 후난(湖南), 광시(廣西), 구이저우(貴州), 윈난(雲南), 푸젠(福建), 장시(江西)성 등지를 다니면서 노동민요와 소수민족의 민요, 민간의 음악을 채록하여  중국인의 정서를 한층 풍부하게 창작하는 음악 활동에  온 힘을 기울였다.

1952년  눈덮인 만주땅 북녘 흥안령의 생활상을 통해 '벌목가'와 '흥안령에 눈 내리네'를 작곡하기도 했다.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을 취득했다(1956년 귀화)...

 

 

정율성은 1959년 중국 반우파정치운동 기간 반당분자라는 누명을 썼으며 1966년 문화대혁명 초기 특무(스파이)라는 죄명으로 감금돼 수년 동안 창작 권리와  음악활동 자격을  박탈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1976년 문화화대혁명이 끝난 뒤 창작활동을 재개하였으나  1976년 12월 7일  베이징 근교의 운하에서 취미인 그물고기잡이를 하다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율성은 중국 공산당 혁명열사들이 묻히는 스징산루(石景山路) 바바오산 혁명공묘(八寶山革命公墓)에 묻혀 있으며 비문에 그의 공적이 적혀 있다. 

 

郑律成 墓

 

혁명음악가이자 항일투사 정율성(鄭律成)의 비문 

“人民은 영원하며, 율성 同志의 노래도 영원하다. 中國人民은 그의 노래를 부르면서 일제 침략자들을 몰아냈고,

낡은 중국을 뒤엎었으며, 새 중국을 건립했다.” .

 

정율성 사후 1년째인 1977년 베이징에서 ‘정율성선생 추모1주년 기념작품음악회’가 열렸으며 당시 유명 작곡가 리환즈(李換之)가 지휘를 맡았다.

 

정율성, 항일운동에 가담한 형들을 따라 중국으로 이주한 음악가 [광주MBC 다큐]

https://www.youtube.com/watch?v=rpaMqOCQgoU 

조회수 4,065회 2019. 10. 14.

 

정율성은? 1914년 8월 13일 광주에서 태어나 1933년 항일운동에 가담한 형들을 따라 중국으로 이주한 음악가!

1937년 옌안(延安)의 루쉰 예술학교에서 작곡을 전공하고 1976년 10월 뇌일혈로 12월 7일 타계할 때까지 평생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가곡.가극.영화 음악 분야에서 360여 곡에 이르는 작품을 남겼다.

 

이러한 정율성의 음악세계와 새로운 한-중간 문화교류의 가능성을 조명해 본다. (2005년 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