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 조봉암(竹山 曺奉岩 · 1898~1959) 선생 묘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 진해공원
죽산 조봉암선생 추모비(竹山曺奉岩先生追慕碑)
본관은 창녕( 昌 寧). 호는 죽산( 竹 山). 1899년 9월 25일 경기도 강화군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대한민국의 항일운동가이자 정치인.
1919년 3.1 운동에도 참여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짧게 활동하였다. 이후 좌경화되어 소련의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으면서 고려공산당, 조선공산당, 중국공산당을 조직하고 입당한 한국과 중국의 공산주의자. 1945년 광복 직후에도 경도되어 조선공산당에서 움직였으나 1946년 이후 사회민주주의로 전향하였다. 조봉암은 전향한 공산주의자 중 드물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1948년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 선거에 둘 다 참여하였다.
이승만에 의해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농지개혁을 주도하였으며 후에 국회부의장을 역임하였다.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와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2위를 기록하면서 이승만의 라이벌로 부상하였다.
1958년 1월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체포되었고 1959년 2월 27일 사형을 선고받으면서 7월 31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2011년 1월 대법원의 재심 판결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청년기 및 독립 운동
1898년 9월 25일 강화군 선원면 금월리의 빈농 집안에서 아버지 조창규(曺昌奎)와 어머니 강릉 유씨(江陵 劉氏) 사이에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907년 강화공립보통학교 4년제에 입학하였고, 1910년 잠두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1911년 강화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2년제 농업보습학교에 입학하였다. 1913년 농업보습학교를 졸업하였다.
1914년 강화군청의 급사로 취업하였다. 그러나 원칙을 고수한 탓에 상관과 마찰이 잦았다. 이후 다른 직원들과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조봉암의 주산 실력은 좋았으나, 상사에게 의심을 받았고, 그와의 불협화음으로 곧 군청 공무원직을 그만두게 되었다고 한다.
1919년 경성 YMCA 중학부에서 1년 학습했고 3.1 운동에 참여하여 1년간 투옥되었다. 출옥 후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의 내부 갈등에 회의를 느껴 일본으로 가서 주오대학 전문부 경제학과를 다니다 중퇴했다.
외국과 국내의 공산주의 활동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무정부주의에 심취하기도 했고 이어 사회주의 계열 단체에 참가하면서 좌경화되어 공산주의 사상을 접하게 된다. 조봉암은 1922년 국내로 귀국하여 10월 코민테른의 지령에 따라 소련에서 열린 웨르흐네스크의 고려공산당 회의에 조선대표로 참가했다. 이후 모스크바로 건너가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속성과에 입학해 다녔지만 2년간 수료하였으나, 폐결핵으로 관둬야 했다. 코민테른 측에서는 요양 후 복학을 권했지만 당시 치료약도 없던 폐결핵은 요양과 재발을 반복하다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중병이었다. 그 때문에 조봉암은 목숨을 걸고 국내로 귀국했다.
1924년 신흥청년동맹을 결성하고 해주, 평양, 인천등지에서 강연활동을 하였고,1924년 6월 동지인 김조이와 결혼을 하였다.1924년 9월 코민테른이 조선공산청년동맹과 조선공산당을 조직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국내로 잠입해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조직을 주도하였고 조직 중앙위원장을 지냈다. 동시에 9월 조선일보 기자가 되었다.
1925년 4월 17일 경성에서 열린 조선공산당의 조직에 참여하고, 4월 18일 서울에서 박헌영, 김단야(金丹冶) 등과 박헌영의 집에서 비밀리에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하고 간부가 되었다. 조봉암이 이런 일련의 일을 활동하면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던데는 고향 선배 김찬의 도움이 절대적이기도 했다. 조봉암은 김찬의 도움을 얻어 활동을 전개하면서 '박철환' 등의 가명을 사용했고 연사로 이름을 날렸다. 1925년 4월말 조선공산당을 승인받기 위하여 모스크바로 출국하였고, 1925년 5월 말쯤 도중에 상하이에 있는 여운형의 집을 찾아가서 4월에 조선공산당이 수립되었으므로 제3인터내셔널의 승인을 받으러 모스크바로 가야 하니 소련 영사관에 여권 교부를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여운형에게 여권을 받았다. 1925년, 조봉암과 조동호는 조선공산당 밀사 자격으로 모스크바로 향했다. 8월 모스크바에서 도착 코민테른으로부터 조선공산당을 승인받는다. 그러나 1925년 11월 22일 조선공산당은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인 '신의주 사건'으로 조선공산당 임원들이 검거되었을 때 중국으로 도주한다.
1926년 1월 상하이로 가서 김찬, 김단야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해외부를 설치하였다. 5월 만주로 건너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조직하고, 책임비서에 선출되었다. 1926년 7월 상하이 코민테른 극동부 조선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27년 다시 중국 상하이의 공동 조계에 가서 여운형의 집에 식객으로 얹혀 살게 되는데 첫사랑이자 죽마고우였던 김이옥은 폐결핵에 걸리자 조봉암을 보고 죽어야겠다 싶어 일본 나가사키에서 중국 상하이를 거쳐 보름 가까이 걸려 그를 만나서 동거를 시작했다. 조봉암은 이미 김조이와 결혼한 상태였지만 이 때 김조이는 러시아에서 유학 중인 관계로 오래 헤어져 있었다. 4월에 임정 요인들을 상대로 민족유일당을 추진하기도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조봉암은 이때즘 코민테른의 신임을 얻고 있었기에, 4월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원칙에 따라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뒤, 중국공산당 장쑤성위원회 산하에 한인지부를 조직하고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동년 6월 경에는 중국 한구에서 개최된 국제적색노동조합 주최의 범태평양노동자대회에 조선대표로 출석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또 1927년 11월에 재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의 상해지부를 조직하였다.
1928년 5월12일부터 15일간 길림성 회구현에서 개최된 전민족획일당조직총성회의에 참석하는 등 상해에서 활동한 좌익계의 청년들의 교양에 힘썼고 재중국한국인청년동맹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1928년 9월 30일 김이옥이 딸 호정을 출산하였고, 조봉암은 김이옥(1905~1933.10.26)과의 사이에서 장녀 조호정(1928.09.30~2022.10.26)을 낳았으나 김이옥은 결국 폐결핵으로 죽었는데 이 병을 고치기 위해 조봉암이 중국사회주의청년단의 공금을 유용한 것과 공산주의 경력은 두고두고 정치계에서 발목을 잡혔다. 특히 박헌영과 크게 대립했는데 공산주의 활동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박헌영의 극심한 조봉암 공작은 광복 후 조봉암이 남조선로동당과 거리를 두는 계기가 된다.
1931년 1월 중국공산당 상하이지부 서기가 되었다. 1932년 9월 28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 프랑스공원에서 체포되었고 12월 고국으로 압송되었다. 1932년 투옥되어 12월 27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을 선고 받았다. 7년간 감옥에서 복역하였는데 신의주 감옥에서 복역 중 고문과 혹독한 추위에 시달려 끝내 손가락 마디 7개가 동상으로 잘려나가기까지 했다고 한다.# 1933년 김이옥, 조호정 모녀가 귀국하였으나, 10월 26일 강화도에서 김이옥이 죽었다.
1938년 출옥 후 인천으로 내려가 살면서 김조이와 재결합하였다. 김조이의 친정 식구들이 창원에서 인천으로 이사오기도 한 것을 보면 이 때의 생활은 나름 괜찮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향 사람들의 도움으로 왕겨를 공급하는 조합에서 일을 보며 지내던 중 1945년 1월 해외와 비밀 연락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예비구금령으로 구속,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광복되던 날 일본 순사가 찾아와 조봉암과 함께 갇혀 있던 사람들을 불러내서 다른 방에 2열로 앉혔는데 조봉암은 사형을 예상하고 눈을 질끈 감았는데 순사가 '곧 항복할 것이다'라고 해서 놀랐다고 한다. 그러다가 윤봉림을 만났다.
1924년 신흥청년동맹을 결성하고 해주, 평양, 인천등지에서 강연활동을 하였고,1924년 6월 동지인 김조이와 결혼을 하였다.1924년 9월 코민테른이 조선공산청년동맹과 조선공산당을 조직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국내로 잠입해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조직을 주도하였고 조직 중앙위원장을 지냈다. 동시에 9월 조선일보 기자가 되었다.
1925년 4월 17일 경성에서 열린 조선공산당의 조직에 참여하고, 4월 18일 서울에서 박헌영, 김단야(金丹冶) 등과 박헌영의 집에서 비밀리에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하고 간부가 되었다. 조봉암이 이런 일련의 일을 활동하면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던데는 고향 선배 김찬의 도움이 절대적이기도 했다. 조봉암은 김찬의 도움을 얻어 활동을 전개하면서 '박철환' 등의 가명을 사용했고 연사로 이름을 날렸다. 1925년 4월말 조선공산당을 승인받기 위하여 모스크바로 출국하였고, 1925년 5월 말쯤 도중에 상하이에 있는 여운형의 집을 찾아가서 4월에 조선공산당이 수립되었으므로 제3인터내셔널의 승인을 받으러 모스크바로 가야 하니 소련 영사관에 여권 교부를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여운형에게 여권을 받았다. 1925년, 조봉암과 조동호는 조선공산당 밀사 자격으로 모스크바로 향했다. 8월 모스크바에서 도착 코민테른으로부터 조선공산당을 승인받는다. 그러나 1925년 11월 22일 조선공산당은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인 '신의주 사건'으로 조선공산당 임원들이 검거되었을 때 중국으로 도주한다.
1926년 1월 상하이로 가서 김찬, 김단야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해외부를 설치하였다. 5월 만주로 건너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조직하고, 책임비서에 선출되었다. 1926년 7월 상하이 코민테른 극동부 조선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27년 다시 중국 상하이의 공동 조계에 가서 여운형의 집에 식객으로 얹혀 살게 되는데 첫사랑이자 죽마고우였던 김이옥은 폐결핵에 걸리자 조봉암을 보고 죽어야겠다 싶어 일본 나가사키에서 중국 상하이를 거쳐 보름 가까이 걸려 그를 만나서 동거를 시작했다. 조봉암은 이미 김조이와 결혼한 상태였지만 이 때 김조이는 러시아에서 유학 중인 관계로 오래 헤어져 있었다. 4월에 임정 요인들을 상대로 민족유일당을 추진하기도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조봉암은 이때즘 코민테른의 신임을 얻고 있었기에, 4월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원칙에 따라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뒤, 중국공산당 장쑤성위원회 산하에 한인지부를 조직하고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동년 6월 경에는 중국 한구에서 개최된 국제적색노동조합 주최의 범태평양노동자대회에 조선대표로 출석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또 1927년 11월에 재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의 상해지부를 조직하였다.
1928년 5월12일부터 15일간 길림성 회구현에서 개최된 전민족획일당조직총성회의에 참석하는 등 상해에서 활동한 좌익계의 청년들의 교양에 힘썼고 재중국한국인청년동맹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1928년 9월 30일 김이옥이 딸 호정을 출산하였고, 조봉암은 김이옥(1905~1933.10.26)과의 사이에서 장녀 조호정(1928.09.30~2022.10.26)을 낳았으나 김이옥은 결국 폐결핵으로 죽었는데 이 병을 고치기 위해 조봉암이 중국사회주의청년단의 공금을 유용한 것과 공산주의 경력은 두고두고 정치계에서 발목을 잡혔다. 특히 박헌영과 크게 대립했는데 공산주의 활동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박헌영의 극심한 조봉암 공작은 광복 후 조봉암이 남조선로동당과 거리를 두는 계기가 된다.
1931년 1월 중국공산당 상하이지부 서기가 되었다. 1932년 9월 28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 프랑스공원에서 체포되었고 12월 고국으로 압송되었다. 1932년 투옥되어 12월 27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을 선고 받았다. 7년간 감옥에서 복역하였는데 신의주 감옥에서 복역 중 고문과 혹독한 추위에 시달려 끝내 손가락 마디 7개가 동상으로 잘려나가기까지 했다고 한다.# 1933년 김이옥, 조호정 모녀가 귀국하였으나, 10월 26일 강화도에서 김이옥이 죽었다.
1938년 출옥 후 인천으로 내려가 살면서 김조이와 재결합하였다. 김조이의 친정 식구들이 창원에서 인천으로 이사오기도 한 것을 보면 이 때의 생활은 나름 괜찮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향 사람들의 도움으로 왕겨를 공급하는 조합에서 일을 보며 지내던 중 1945년 1월 해외와 비밀 연락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예비구금령으로 구속,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광복되던 날 일본 순사가 찾아와 조봉암과 함께 갇혀 있던 사람들을 불러내서 다른 방에 2열로 앉혔는데 조봉암은 사형을 예상하고 눈을 질끈 감았는데 순사가 '곧 항복할 것이다'라고 해서 놀랐다고 한다. 그러다가 윤봉림을 만났다.
. 대한민국 정치 활동
그는 무소속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농지개혁을 추진하던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초대 농림부 장관에 임명되었고 대지주 계층 중심인 한국민주당의 격렬한 반대에도 과감하게 농지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로써 지주와 소작농 계급이 대다수를 이루던 농촌 사회의 불안정 요소를 점차 줄여나갔다. 농지개혁의 목표는 소작농의 비중을 줄이고 자영농의 비중을 늘리면서 농업 자본을 산업 자본으로 전환하는 것이었는데 소작농의 설움을 겪었던 민간인에게 호응을 얻었다. 비록 불완전한 형태였지만 이러한 개혁 정책 덕분에 6.25 전쟁 당시 농민들이 계급을 해방한다는 북한군의 선전에 휩쓸리지 않았다는 설이 존재하며[16] 무엇보다 농부의 입장에서는 농사지을 자신의 땅이 생겼다는 것은 굉장한 밑천이다. 이 밑천은 후에 자식 교육에 투자되는데 비록 빈천하지만 당시 터져 나온 폭발적인 교육열과 더불어 서민들이 먹고 살면서 교육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재원 중 하나가 되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재선되었고 국회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직후 북한의 기습으로 6.25 전쟁이 발발하던 시기에 신성모와 채병덕은 이승만에게 전장의 상황과 달리 허위 보고를 하며 모두가 피난을 더욱 멀리 가게될 정도로 상황을 악화되게끔 하였다. 신익희조차 자신의 부하인 윤길중에게 함께 피난을 가자고 약속하고서는 가족들을 데리고 먼저 서울에서 도망쳤는데 조봉암은 이들과는 달리 끝까지 서울에 남아서 다른 국회의원들의 피난 비용을 마련해주고 북한군에게 넘어가서는 안 되는 공문서들을 불태우고 정리하여 새벽차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 과정에서 정작 아내인 김조이는 함께 피난하지 못했고 결국 행방불명되고 말았다.[17] 그렇게 조봉암은 납북당하지 않고 피난하였고[18] 부산에서 정치에 참여하여 이승만을 견제하였다. 당시에 영향력 있는 중도파 정치인이었던 김규식, 안재홍, 조소앙은 납북되었기 때문에 이승만을 견제할 수 있는 인물은 조봉암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부산까지 따라온 조봉암을 보고 "북에 가지 않고 여기에는 왜 왔냐"고 말했다고 한다.
두번의 대선 출마
대한민국 국회 간선으로는 재선이 어려워진 이승만은 이른바 발췌 개헌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한다. 이에 따라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는 직선으로 치러지게 되었는데 조봉암은 이승만에 맞서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79만여 표를 득표해 2위를 기록하였다. 1955년 민주당에 합류하고자 하였으나 조병옥, 신익희 등은 공산당 활동을 했던 조봉암의 입당을 반대했다. 반면 장택상이나 김성수는 공산당 결별 선언만 확실히 한다면 입당을 허락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민주당 주류에서도 마지못해 입당 허가를 고려하겠다고 했지만 얼마 뒤 김성수가 죽어버리면서 입당은 결국 무산되었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유엔 감시하 총선거를 통한 평화 통일, 국민 의료 보장, 무상 교육을 내세우면서 다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의 신익희 후보가 갑작스럽게 지병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조봉암이 이승만의 유일한 대항마로 떠올랐으나 290만여 표 차이로 이승만에게 패배하였다.유효표 기준으로는 216만 4,000여표를 얻었는데 유효표 기준으로는 30%, 무효표까지 포함하면 23.9%의 지지율을 얻는다. 조봉암 측은 투·개표장에 참관인을 내는 것조차 어려웠고 일부 참관인은 정치깡패들의 폭력에 의해 추방되었다. 사실 당시 민주당이 신익희 후보가 죽은 이후 조봉암을 지지했다면 조봉암은 부정 선거에도 불구하고 당선되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민주당은 조봉암에게 대통령 자리를 넘겨주느니 이승만이 3번 하는 것이 낫다는 입장에서 '신익희 추모표'를 찍을 것을 독려했고 무효표만 185만여 표가 나왔다. 당시 이승만의 득표수가 약 504만여 표였고 조봉암의 득표수가 약 216만여 표였으니 민주당이 기권 투표를 유도하지만 않았으면 5:4로 싸워볼만한 형국이었다. 물론 신익희의 185만여 표가 고스란히 조봉암에게 가지는 않았을 것이고 부동층이 있었겠지만 대략적인 형세가 그러했다는 말이다. 당시 선거 결과 #1, 당시 선거 결과 #2
한편 조봉암의 선거 캠프에는 김성주도 참가했는데 좌익과 빨갱이는 사탄이니 모두 죽여야 한다고 외치며 백색테러를 일삼던 반공 단체인 서북청년단의 간부 출신이었다. 평화주의자인 조봉암의 성향을 본다면 전혀 맞지 않는 인물인데 왜 이런 사람을 선거 캠프에 받아주느냐고 조봉암 선거 캠프 내에서도 의문이 많았는데 조봉암 본인이 정략적인 의도로 일부러 김성주의 참가를 허락했을 거라는 분석이 있다. 이승만으로부터 빨갱이라고 하도 공격을 받다보니 그런 정치적 공격에 대한 방패로 삼고자 일부러 반공 단체인 서북청년단 출신 김성주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김성주 개인의 원한도 있었는데 원래 서북청년단 간부인 김성주는 한 때 이승만의 심복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서북청년단이 미국의 지원을 받아 점차 자신에게 맞서려고 하자 서북청년단을 재빨리 해체시켜 버렸고 이에 김성주는 이승만에게 깊은 원한을 갖게 되었다. 1950년 10월경 6.25 전쟁 때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을 하여 평양을 점령하자 김성주는 재빨리 유엔에 붙어서 유엔의 힘을 등에 업고 평안남도 지사가 되었다. 그 후 이승만이 평양에 보낸 관리들은 모두 김성주가 쫓아냈고 이승만이 평양에 가서 평양 시민들 앞에 연설을 하는 자리에 김성주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이승만이 몹시 분노하였다는 일화도 있다. 헌데 중공군이 쳐들어오면서 김성주는 몸을 피해 남쪽으로 달아났으나 이미 이승만의 미움을 산 터라 처신이 몹시 어려웠는데 마침 이승만의 정적이던 조봉암이 떠오르자 그에게 붙어서 이승만에 대한 복수를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유엔 감시하 총선거를 통한 평화 통일, 국민 의료 보장, 무상 교육을 내세우면서 다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의 신익희 후보가 갑작스럽게 지병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조봉암이 이승만의 유일한 대항마로 떠올랐으나 290만여 표 차이로 이승만에게 패배하였다.유효표 기준으로는 216만 4,000여표를 얻었는데 유효표 기준으로는 30%, 무효표까지 포함하면 23.9%의 지지율을 얻는다. 조봉암 측은 투·개표장에 참관인을 내는 것조차 어려웠고 일부 참관인은 정치깡패들의 폭력에 의해 추방되었다. 사실 당시 민주당이 신익희 후보가 죽은 이후 조봉암을 지지했다면 조봉암은 부정 선거에도 불구하고 당선되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민주당은 조봉암에게 대통령 자리를 넘겨주느니 이승만이 3번 하는 것이 낫다는 입장에서 '신익희 추모표'를 찍을 것을 독려했고 무효표만 185만여 표가 나왔다. 당시 이승만의 득표수가 약 504만여 표였고 조봉암의 득표수가 약 216만여 표였으니 민주당이 기권 투표를 유도하지만 않았으면 5:4로 싸워볼만한 형국이었다. 물론 신익희의 185만여 표가 고스란히 조봉암에게 가지는 않았을 것이고 부동층이 있었겠지만 대략적인 형세가 그러했다는 말이다. 당시 선거 결과 #1, 당시 선거 결과 #2
한편 조봉암의 선거 캠프에는 김성주도 참가했는데 좌익과 빨갱이는 사탄이니 모두 죽여야 한다고 외치며 백색테러를 일삼던 반공 단체인 서북청년단의 간부 출신이었다. 평화주의자인 조봉암의 성향을 본다면 전혀 맞지 않는 인물인데 왜 이런 사람을 선거 캠프에 받아주느냐고 조봉암 선거 캠프 내에서도 의문이 많았는데 조봉암 본인이 정략적인 의도로 일부러 김성주의 참가를 허락했을 거라는 분석이 있다. 이승만으로부터 빨갱이라고 하도 공격을 받다보니 그런 정치적 공격에 대한 방패로 삼고자 일부러 반공 단체인 서북청년단 출신 김성주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김성주 개인의 원한도 있었는데 원래 서북청년단 간부인 김성주는 한 때 이승만의 심복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서북청년단이 미국의 지원을 받아 점차 자신에게 맞서려고 하자 서북청년단을 재빨리 해체시켜 버렸고 이에 김성주는 이승만에게 깊은 원한을 갖게 되었다. 1950년 10월경 6.25 전쟁 때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을 하여 평양을 점령하자 김성주는 재빨리 유엔에 붙어서 유엔의 힘을 등에 업고 평안남도 지사가 되었다. 그 후 이승만이 평양에 보낸 관리들은 모두 김성주가 쫓아냈고 이승만이 평양에 가서 평양 시민들 앞에 연설을 하는 자리에 김성주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이승만이 몹시 분노하였다는 일화도 있다. 헌데 중공군이 쳐들어오면서 김성주는 몸을 피해 남쪽으로 달아났으나 이미 이승만의 미움을 산 터라 처신이 몹시 어려웠는데 마침 이승만의 정적이던 조봉암이 떠오르자 그에게 붙어서 이승만에 대한 복수를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진보당 사건과 최후
1956년 11월 조봉암은 진보당을 창당하는데 당시 특무대와 결탁해서 대북 밀무역을 하던 양명산이 간첩으로 체포되어협박과 회유 끝에 "북한 공작금을 조봉암의 대통령 선거 자금 및 진보당 창당 자금으로 지원했고 북의 서류를 조봉암에게 주었다"는 진술을 하게 된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조봉암과 진보당 간부들을 기소하였는데 문제는 증거가 맞지도 않고 양명산도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하게 된다. 결국 유병진 판사는 조봉암과 진보당 간부들의 간첩 혐의는 무죄로 선고하고 조봉암에게만 불법 무기 소지죄를 적용하여 5년 징역을 선고했다.
야인시대 같이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도 흔히 묘사되는 것처럼, 당시의 어지러운 정세 하에서 정치적 주요 인사들은 누구나 권총 하나 정도는 소지하고 있어야 했다. 따라서 이승만 정권에서 조봉암을 숙청하려고 마음먹은 상황에서 무죄를 때릴 수는 없고 엮어 넣기는 해야겠기에 궁여지책으로 엮은 것이 불법 무기 소지라는 것이다. 당시 판사 유병진의 회고에 의하면 그렇게라도 안 하면 조봉암이 더 위험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는 반공 진영이 보기엔 너무 가벼운 처벌이었기 때문에 반공 청년단들은 "용공 판사 타도", "조봉암 일당에 간첩죄를 적용하라"를 외치며 더욱 난동을 부렸고 결국 유병진은 법관 연임 심사에서 탈락해 법복을 벗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병진은 조봉암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것을 미안하게 생각했으며 조봉암의 기일마다 묘소를 참배하며 사죄해왔다.
그래서 검찰에서 내세운게 진보당의 '평화 통일' 정강이 반공법 위반이라는 것이고 조봉암은 바로 이 혐의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당시 조봉암과 친분이 있었던 장택상을 비롯하여 반 이승만 계열의 국회의원들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결국 1959년 7월 31일 조봉암은 교수형에 처해지고 말았다. 사형 집행일 아침 사형장을 향해 걸어가던 중 호송 간수를 잠깐 기다리게 한 뒤 서대문형무소 담장 옆에 피어 있는 코스모스에 다가가 한참 동안 꽃향기를 맡은 뒤 담담히 사형장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집행관은 의례적인 절차에 이어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느냐고 물었는데 조봉암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이 박사는 소수가 잘 살기 위한 정치를 하였고 나와 나의 동지들은 국민 대다수를 고루 잘 살리기 위한 민주주의 투쟁을 했소.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정치 운동을 한 것 밖에는 없는 것이오. 그런데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가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오. 다만, 나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그 희생물로는 내가 마지막이 되기를 바랄 뿐이오.
조봉암은 입회 목사에게 누가복음 제23장 22절을 읽어달라고 부탁했고 1959년 7월 31일 오전 11시 3분 교수형을 당했으며 11시 14분에는 이미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 싸늘한 시체로 변하여 검시관의 검시를 받았다. 처형 직전 조봉암이 남긴 유언은 "막걸리 한 사발과 담배 한 개비를 달라"였다고 한다. 그러나 간수들은 막걸리는 주지 않는 대신 담배는 허락하여 조봉암은 마지막으로 담배 한 개비를 천천히 피운 후 형이 집행되었다. 자유당 정권은 조봉암 처형에 대해 철저히 언론 통제를 했고 언론들은 침묵했다. 당시 언론 측에서 이런 통제에 대한 법적 근거를 묻자 조선총독부 시행령이라고 답했는데 일제강점기 시행령은 특정한 범죄자의 사형 내지는 장례식 관련 보도를 통제하는 것이지, 그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 통제하는 것은 아니다. 일제의 시행령 자체도 이상하게 해석했을뿐더러, 이미 정부 수립 10년이 넘은 시점에 뜬금없이, 일제를 계승한 것도 아닌 대한민국 정부가 정적을 제거하면서 일제의 시행령(독립운동가들의 죽음에 대한 일제의 법제)을 따른다는 것도 참 구차한 변명이다.
이 사건에 대해 당시에 조봉암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의견이 있었고 보수 논조의 동아일보도 조봉암 재판 과정에서 조봉암이 간첩 양명산에게 속아서 그렇게 되었지 조봉암이 간첩이었다는 것은 아니라는 기사를 냈다. 미국의 관점도 마찬가지였는데 1958년 1월 23일자 주한미국대사관은 보고 문서(Joint Weeka)에 『On basis available information Embassy believes purported evidence against Cho is, at best flimsy and that arrest and reported confession is administration attempt to discredit Progressive Party.』라고 작성하였다. 번역하면 『이용 가능한 기본적인 정보들로부터 판단하건대 대사관 측은 조봉암에 대한 불리한 증거라고 하는 것들은 기껏해야 설득력이 없다고 밖에 할 수 없으며 구속 건과 보도된 증언은 진보당을 흠집내기 위한 정권의 시도다.』라는 뜻인데 미국 또한 진보당 사건을 조작으로 보고 있었다. 일부에게 참군인으로 추앙받는 이종찬 역시 국민방위군 사건을 해결할 때 많이 만났던 조봉암이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하며 민간인이 군사 재판에 회부된 불법적인 재판이니 사형은 안 된다며 그 사건으로 권력의 핵심에 오른 이기붕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승만 정권에 대한 민간의 불신은 더욱 강해졌으며 9개월 뒤에 그러한 불신은 터져 나오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조봉암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었을 때 조봉암의 무죄를 외친 것은 극우파 정객인 장택상과 윤치영이었다. 윤치영은 조봉암이 억울하다는 주장을 했고 길을 잘못 들어서 좌경으로 몰린 것 같다고 평하였다. 장택상은 당시 홍진기 법무장관을 찾아다니며 조봉암에 대한 석방 구명 운동을 벌였고 국회에 조봉암의 사면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으며 옥 중의 조봉암을 대신하여 무료로 변론을 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조봉암이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을 끝끝내 막을 수 없었다.
어록
- 1946년 당시 연설.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지는구나.
-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후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을 없내고 모든 사람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고 모든 사람이 착취당하는 것 없이 응분의 노력과 사회적 보장에 의해서 다 같이 평화롭고 행복스럽게 잘살 수 있는 세상, 이것기 한국의 진보주의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 진보당 창당 개회사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한국의 독립을 쟁취해야 할 것은 물론이지만 한국이 독립되어도 일부 사람이 권력을 쥐고 잘 살고 호사하는 그런 독립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모든 사람이 잘 살고 호사할 수 있는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 『조봉암, 내가 걸어온 길』 中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냐.
막걸리 한 사발과 담배 한 개비만 주시오.
- 진보당 사건으로 처형되기 직전에 남긴 유언
이승만 박사가 무서워서 대적하는 사람이 없다면 우리 국민이 너무 불쌍하지 않느냐.
- 장녀 조호정의 회고 中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48
|
경기 2
|
17,620 (37.77%)
|
당선 (1위)
|
초선
|
||
1950
|
경기 3
|
14,095 (42.75%)
|
재선
|
|||
1952
|
797,504 (11.35%)
|
낙선 (2위)
|
|
|||
1956
|
2,163,808 (30.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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