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nderful World

금강산(金剛山) 유점사(楡岾寺)

류지미 2023. 5. 28. 10:05

강원도 고산군 서면 (강원도 고성군 서면 백천교리) 금강산(金剛山)에 있었던 삼국시대 에 창건된 사찰.

 

 

 

                                                                                    강원 고성 유점사 전경


이 절은 서기 4년(유리왕 23)에 창건되었다.
고려 민지(閔漬)의 기문(記文)에 따르면, 석가모니가 입적한 뒤 인도 사람들은 생전에 부처님을 보지 못한 것을 애통해하다가, 부처님의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서 금을 모아 53구의 불상을 조성한 뒤 이를 배에 태우고 바다에 띄우면서 유연국토(有緣國土)에 갈 것을 발원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배는 바다를 항해하다가 월지국(月支國)에 닿았는데, 왕이 이 불상들을 공경하여 전당을 짓고 봉안하였으나 원인 모를불이 나서 전각이 타버렸습니다. 왕이 다시 전당을 짓고자 하였으나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서 “이곳을 떠날 것이니 수고하지 말라.” 하고 만류하므로 이 53불을 다시 배에 태워 바다에 띄웠다.
이 배는 900년 동안 여러 나라를 떠다니다가 신라의 안창현(현재의 강원도)에 닿았다.
이후 그땅에 절을 짓고 유점사라고 하였다 전해진다.

그 이후로는 1408년(태종 8)에는 효령 대군이 태종에게 아뢰어 백금 2만 냥을 얻어서 건물 3,000칸을 중건하였고, 1453년(단종 1)에는 신의(信義)·성료(性了) 등이 중건하였으며, 1467년(세조 13) 세조는 학조(學祖)를 유점사에 보내 절을 중창하게 하였으며, 1595년 (선조 28) 유정(惟政)이 인목대비가 하사한 내탕금(內帑金)으로 중건하였다.
유점사(楡岾寺)는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왕실원찰으로서 시주도 많이 받았던 사찰이었다.

또 일제때는 31본산 중의 하나로 지정되기도 하였으며.31본산 시대에 이 절은 산내·산외 말사 60개의 절을 관장하였던 금강산 제일의 가람이었다. 또 많은 유물,문화재로 당시 금강산 관광의 한 축을 맡기도 하였다.
 

                                                                                 1929년 유점사 산영루

 

능인보전 처마

유점사 능인보전

유점사 능인보전 53불상

통일신라시대 작은 불상 53개를 나무등걸에 안치한것이 특징이다.  석굴암과 함께 '한일병합 이후 고고학적 대발견'으로

여겨졌다.
 
 
 

53불중 일부,미타불상

53불중 일부,목조해수관음보살상

능인보전 천장과 내부가구

효종이 하사했다고 전해지는 의자

유점사 9층 석탑

통일신라시기 만들어졌다고 함.

 

유점사 범종

한국전쟁 당시 유점사가 파괴되면서 땅속에 묻혀 있었다가, 전후(戰後)에 발굴되어 묘향산 보현사로 옮겨졌다.

유점사 옹정7년개주 범종

전후 국립춘천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유점사 승탑군

유점사는 안타깝게도 한국전쟁때 폭격을 맞아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1894년 이래 네 차례나 우리나라를 다녀간 후 유명 저서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을 남긴

영국의  Isabella Bird Bishop(1831-1904) 여사는 수시로 직접 조선 풍경을 찍었다.

사진은 금강산 유점사부도.

 

 

<한국 문화재 수난사>

약탈자들에게 바꿔치기 당한 유점사 53불(楡岾寺 五十三佛)

 

금강산 유점사 전경

 

유점사 능인보전

 

유점사 53불

 

1912, 금강산 지역의 불교 유적을 조사하러 갔던 일본인 전문가 세키노 다다시(關野 貞; 1868~1935)와 야쓰이 세이치(谷井濟一)는 내금강께의 유점사에서 신라시대의 ‘53불 신앙의 실상을 말해주는 높이 약 741cm의 작은 금동 불상 50구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53구 가운데 3구만 잃었을 뿐 거의 고스란히 보존돼 있었던 것이다. 세키노와 야쓰이는 그들이 발견하고 조사한 유점사 53불 중의 유존상들을 1917년과 1920년에 간행된 <조선 고적 도보>(총독부 간행) 5책과 제7책에 사진과 함께 소개하면서 기적적인 대발견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이 때의 학술적인 조사·평가와 사진은 다른 일본인 무법자들에겐 일확천금할 수 있는 좋을 약탈거리의 정보였다.

 

1916 3, 치밀한 사전 계획을 세운 일단의 일본인 무법자들이 마침내 금강산 유점사로 침입해 갔다.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본전인 능인보전(能仁寶殿)으로 달려가서 그 안에 모셔져 있던 53불의 유존상 중에서 가장 값나감직한 신라 유물 17점을 골라잡고 유유히 사라졌다.백주의 약탈이었다. 그런데 그 때 그들은 사승이나 누군가를 위협하느라고 권력 신분을 가장하여 개성에서 왔다고 큰소리를 쳐 결국 자기 노출의 실수를 범했던 것 같다. 그래서 절에서 불상 도난 신고를 받은 경찰은 곧장 개성으로 범인 일당을 추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 범인에게서 도난품을 압수했다면서 일본인 순사(경찰)가 가져온 불상은 17점 전부가 아니라 9점뿐이었다.

 

무력했던 중들은 9점만이라도 살아 돌아온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는 그 이상 문제 삼지 못했다. 또 그 불상들의 조형적인 양식이나 세부적인 형태에 평소 아무런 지식도 관찰도 없었던 중들은 돌아온 9점 가운데 6점은 능인보전에서 도난당했던 유점사 전래의 신라 유물이 아니고 일본인 악당들이 개성에서 지능적으로 바꿔치기 한 원위치 불명의 보잘 것 없는 수상들이란 점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범인을 추적했던 일본인 순사는 개성에서 쉽게 그들을 붙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범인들에게 매수되어 악질적인 음모에 가담했다. 그들은 개성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거나 아니면 범인들이 어디서 또 약탈해 갖고 있었던 듯한 전혀 별개의 대단찮은 작은 불상 6점에다가 유점사에서 훔쳐온 것 중에서 조각 수법이나 형태가 가장 떨어지는 3점을 붙여 도합 9점을 경찰이 압수·반환시키는 것처럼 꾸몄다. 이 음모는 완전히 성공했다. 돌아온 9점의 불상조차도 3분의 2가 형편없는 것으로 바꿔치기 된 사실에 의심을 품은 중은 그 때 유점사에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인 악당들은 그 후 유점사에서 깨끗이 절취한 14신라 불상들을 유점사 전래상이라는 족보까지 붙여 공공연히 국내외로 암매·유출시켰는데, 현재 보스턴 미술관이 언젠지 모르게 입수해 갖고 있는 금동 약사여래 입상은 그 중의 하나로 1917년의 <조선 고적 도보>에 사진과 조사 기록이 수록돼 있다. 또 일본인으로 요코다, 이토 등이 그 때의 유점사 도난품을 입수·소장하고 있었으나 오늘의 행방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유점사 53불 해설>, 황수영 편, 1967).

 

한편 1935 3월에 총독부 박물관의 촉탁이던 일본인 가야모토 가메지로(榧本龜次郞)와 사와 슌이치(澤俊一) 14일간 유점사의 53불을 다시 본격 조사했는데, 뒤에 그들이 작성한 복명서에는 1910년대의 조사 보고에 수록된 원래의 전래상은 36점뿐이고, 엉뚱한 것이 6(1916년에 일본인 도둑들이 바꿔치기한 것), 그리고 과거의 조사 보고에 있는 것 중의 11(사실은 전의 고적 조사 보고에 이유 없이 빠진 3점을 합쳐 14)은 도난당하고 없으며, 따로 1930년에 송만공(宋滿空; 1871~1946) 선사 등이 발의하여 당시 경성 미술품 제작소에서 새로 만들어 보충한 8점의 금동 여래상과 보살 입상이 있었다고 상세히 기록돼 있다. 그러나 8·15 해방 이후 북한 지역인 금강산 유점사의 53불이 어찌되었는지, 해방 직후에 누군가가 모두 싸가지고 남한으로 내려왔다는 설과 평양으로 옮겨져 갔다는 미확인 정보가 전할 뿐이다(앞의 <유점사 53불 해설>).

 
 

금강산(金剛山) 유점사(楡岾寺)

 

일제강점기에는 31본산 중의 하나였다. 사지(寺誌)에 따르면 원래 이 절은 서기 4년(유리왕 23)에 창건되었다고 하며, 53불(佛)의 연기(緣起)와 관련된 창건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고려 민지(閔漬)의 기문(記文)에 따르면, 석가모니가 입적한 뒤 인도 사위성(舍衛城)의 사람들은 생전에 부처님을 보지 못한 것을 애통해하다가, 부처님의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서 금을 모아 53구의 불상을 조성한 뒤 이를 배에 태우고 바다에 띄우면서 유연국토(有緣國土)에 갈 것을 발원하였다.

 

이 배는 신룡(神龍)에 의하여 바다를 항해하다가 월지국(月支國)에 닿았는데, 왕이 이 불상들을 공경하여 전당을 짓고 봉안하였으나 원인 모를 불이 나서 전각이 타버렸다. 왕이 다시 전당을 짓고자 하였으나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서 “이곳을 떠날 것이니 수고하지 말라.” 하고 만류하므로 이 53불을 다시 배에 태워 바다에 띄웠다.

이 배는 900년 동안 여러 나라를 떠다니다가 신라의 안창현(安昌縣) 포구에 닿았다. 현관(縣官) 노춘(盧椿)이 나가 보니 불상들은 없고 바닷가의 나뭇잎이 모두 금강산을 향하여 뻗어 있었다.

 

이에 발길을 그쪽으로 돌렸는데, 흰 개가 나타나서 앞장을 서서 따라갔더니 큰 느티나무가 서 있는 못가에 53불이 있었다. 왕이 이 사실을 듣고 찾아가서 그 땅에 절을 짓고 유점사라 하였다. 광복 전까지 53불 중 3불이 없어지고 50불이 남아 있었다.

 

창건 이후 1168년(의종 22)에는 자순(資順)과 혜쌍(慧雙)이 왕실의 시주로 당우 500여 칸을 중건하였고, 1213년(강종 2)에는 강종이 백은(白銀) 1,000냥을 대선사 익장(益藏)에게 보내어 중수하도록 하였으며, 1284년(충렬왕 10)에는 행전(行田)이 시주를 얻어서 공사를 착수하였는데 1295년에 중건을 완료하였다.

 

1408년(태종 8)에는 효령 대군이 태종에게 아뢰어 백금 2만 냥을 얻어서 건물 3,000칸을 중건하였고, 1453년(단종 1)에는 신의(信義)·성료(性了) 등이 중건하였으며, 1595년 (선조 28) 유정(惟政)이 인목대비가 하사한 내탕금(內帑金)으로 중건하였다.

1636년(인조 14) 화재로 소실된 뒤 곧 중건하였고, 1703년(숙종 29)에는 백금 2,000냥으로 중창하였으며, 1759년(영조 35) 불에 타자 북한치영(北漢緇營)의 승병대장 보감(寶鑑)이 와서 10년의 공사 끝에 중건하였다.

현재의 당우는 53불을 안치한 능인전(能仁殿)을 비롯하여 수월당(水月堂)·연화사(蓮華社)·제일선원(第一禪院)·반룡당(盤龍堂)·의화당(義化堂)·서래각(西來閣) 등 6전(殿) 3당(堂) 3루(樓)가 있다. 이들은 1882년(고종 19)의 대화재 뒤 우은(愚隱)이 중창하였고, 근대의 대선사 대운(大雲)이 중수한 것이다.

이 중 절에서 가장 큰 규모의 건물은 연화사인데, 이곳은 만일회(萬日會)를 열던 법회장소였다고 한다. 31본산 시대에 이 절은 산내·산외 말사 60개의 절을 관장하였던 금강산 제일의 가람이었다.

 

이 밖에 중요문화재로는 『보살계첩 菩薩戒牒』과 「보문품」이 있다. 나옹화상이 스승인 지공(指空)에게서 받은 『보살계첩』은 가로 약 7㎝, 세로 약 10㎝ 크기의 감색 장지에 금니(金泥)로 쓴 것을 책으로 묶은 귀중한 문화재이다.

이 계문의 말미에 있는 ‘지공’이라는 수결과 산스크리트 게송(偈頌) 등은 모두 지공의 친필이어서 귀중한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 인목왕후가 친필로 쓴 은자 「보문품」은 왕후가 서궁(西宮)에 유폐당하고 영창대군이 참변을 당하였을 때 슬하에 남은 외동딸을 위해서 불보살의 보호를 받으려는 간곡한 정성으로 「관세음보살보문품 觀世音菩薩普門品」을 필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