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만나는 북한 문화유산] 금강산 내금강 역사유적
6·25전쟁 대부분 파괴돼 표훈사만 원형 간직
금강산 10대미(美) 중 건축조각미 뽐내는 유적
[편집자주]북한은 200개가 넘는 역사유적을 국보유적으로, 1700개 이상의 유적을 보존유적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지역적 특성상 북측에는 고조선과 고구려, 고려시기의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지난 75년간 분단이 계속되면서 북한 내 민족문화유산을 직접 접하기 어려웠다. 특히 10년 넘게 남북교류가 단절되면서 간헐적으로 이뤄졌던 남북 공동 발굴과 조사, 전시 등도 완전히 중단됐다. 남북의 공동자산인 북한 내 문화유산을 누구나 직접 가 볼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하며 최근 사진을 중심으로 북한의 주요 문화유산을 소개한다.
(서울=뉴스1) 정창현 머니투데이미디어 평화경제연구소장 = 예로부터 금강산에는 10개의 아름다움이 있다고 했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산악미, 풀과 나무와 바위가 조화된 계곡미, 아늑하고 온화한 호수미, 금강산의 절경을 동해에 옮겨놓은 해양미, 멀리 동서남북을 볼 수 있는 전망미, 신비와 감탄과 황홀감과 장쾌함으로 저도 모르게 '야'하는 감흥미, 울창한 수림과 특수식물을 보게 되는 수림미, 선조들의 슬기와 재능을 보여주는 건축조각미, 세상의 아름다운 색깔들의 집결체인 색채미, 금강산의 바람과 구름과 안개가 이루어내는 풍운 조화미 등이다. 그중 건축조각미를 잘 보여주는 것이 내금강에 남아 있는 불교유적들이다.
금강산은 예로부터 사찰이 많다고 하여 8만 9암자로 전해 왔다. 금강산 최대의 사찰 유점사(楡岾寺)를 비롯하여 장안사(長安寺)·신계사(神溪寺)·표훈사(表訓寺) 등이 4대사찰로 꼽힌다.그러나 6·25전쟁의 참화는 이곳도 비껴가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찰이 치열한 격전 속에 불타버리고, 일부 전각과 석탑만이 남아 예전의 영화를 짐작케 할 뿐이다. 그 중 장안사터, 표훈사, 정양사, 마하연터가 금강산 내금강에 남아 있다.
금강산 내금강 청학봉(靑鶴峯) 아래 자리 잡고 있는 표훈사와 내금강 만폭동 계곡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02.© 뉴스1내금강의 진수는 내강리에서 장안사터를 거쳐 표훈사·정양사터·만폭동을 지나 보덕암·마하연·묘길상을 둘러보는 코스이다. 고려 때는 송도(개성)에서 말을 타고 출발하여 배점(배재령)을 넘어 표훈사에 도착해 내금강을 둘러본 후 외금강으로 넘어갔다. 송도에서 표훈사까지는 일주일 정도가 걸렸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는 경원선과 금강산전철을 타고 내금강역에 내려서 걸어갔으나, 2007년 시작된 내금강관광 때는 외금강 온정리에서 2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온정령을 넘어 표훈사에 도착한 후 만폭동계곡을 탐승했다.
금강산 내금강 안내도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02.© 뉴스1 1930년대에 금강산 내금강 표훈사 뒤쪽에 있는 정양사를 방문해 기념촬영하고 있는 수학여행단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02.© 뉴스1표훈사(表訓寺, 국보유적 제97호)는 '금강산 4대사찰' 중 유일하게 전쟁의 참화를 피했다. 표훈사는 내금강 어귀에서 만폭동 골짜기 쪽으로 약 4㎞ 거리에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강원도 금강군 내금강면 장연리에 속한다. 표훈사에는 내금강 만폭동으로 가던 조선시대 방랑시인 김삿갓(김병연)이 능파루에 모여 시짓기 내기를 하던 선비들을 단 두 줄의 시구(詩句)로 코를 납작하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금강산 내금강 표훈사의 대웅전인 반야보전과 명부전, 영산전 전경. 금강산 사찰 중 유일하게 전쟁의 참화를 피해 온전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02.© 뉴스1금강산 1만 2천봉에 머무르고 있다는 보살들의 우두머리 법기보살을 주존으로 모신 사찰로, 670년(신라 문무왕 10)에 신라의 승려 능인·신림·표훈이 처음 세우고 신림사라 했다가 3년 후 표훈사로 이름을 고쳤다. 세월이 흐르면서 불에 타버리거나 쇠락한 것을 1682년(숙종 8)과 1778년(정조 2) 두 차례에 걸쳐 복원했다. 원래 20여 동의 많은 전각이 있었지만 현재 경내에는 반야보전(般若寶殿), 명부전, 영산전, 어실각(御室閣), 칠성각, 능파루(凌波樓) 등의 전각과 7층석탑이 남아 있다.
금강산 내금강 초입에 있는 표훈사 전경. 현재 반야보전(般若寶殿), 명부전, 영산전, 어실각(御室閣), 칠성각, 능파루(凌波樓) 등의 전각과 7층석탑이 남아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02.© 뉴스1
표훈사의 가람배치는 마당의 7층석탑을 중심으로 본전인 반야보전과 입구인 능파루가 남북의 중심축을 따라 마주 보고, 반야보전을 중심으로 명부전과 영산전이 양쪽에 나란하게 있으며, 석탑을 중심으로 동서 양쪽에 극락전터와 명월당터가 있다. 또 능파루를 중심으로 동서 양쪽에는 요사채인 판도방(判道房)과 어실각이 있다.
금강산 내금강 표훈사의 영산전 내부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02.© 뉴스1표훈사를 왼쪽으로 끼고 숲길을 조금만 올라가면 두 개의 커다란 바위가 머리를 맞대고 있는데 이곳이 금강문이다. 이 좁은 문을 지나면 웅장한 물소리와 타래 치는 물살, 그리고 장엄한 계곡이 눈앞에 펼쳐진다. 만폭동의 시작이다.
금강산 내금강 만폭동계곡으로 들어가는 금강문.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02.© 뉴스1만폭동 골짜기를 따라 백룡담, 흑룡담, 벽화담을 지나면 분설담이 나오고, 분설담의 오른쪽 20미터 벼랑에 매달리듯 서 있는 보덕암(普德庵, 국보유적 제98호)이 눈에 들어온다. 내금강의 오현봉, 청학봉, 향로봉 등을 배경으로 구리 기둥 하나에 의지하여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사찰로, 그 모습이 참으로 기묘하여 보는 사람마다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고구려 안원왕(安原王) 때에 보덕화상이 창건했다. 지금의 건물은 1675년(조선 숙종 1)에 다시 짓고, 1808년(순조 8)에 중수한 것이다.
금강산 내금강 법기봉 중턱에 있는 표훈사의 말사인 보덕암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02.© 뉴스1
원래 2채의 건물이 있었는데 하나는 너비 1.6미터, 높이 2미터, 깊이 5.3미터의 자연굴인 보덕굴 앞을 막아 절벽에 지은 본전이고 다른 하나는 굴 위에 지었던 요사채 판도방이다. 본전을 지탱하고 있는 높이 7.3미터의 구리기둥은 1511년(조선 중종 6)에 설치한 것으로, 나무기둥에 19마디의 동판을 감았다. 벼랑 위 평지에 있던 판도방과 돌탑은 없어지고 지금은 보덕굴로 내려가는 층대만 남아 있다. 보덕굴이란 이름은 옛날 이곳에서 마음씨 착한 보덕각시가 홀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금강산 법기봉 중턱에 오직 바지랑대 같은 기둥에 의지해 있는 표훈사 보덕암 본전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02.© 뉴스1
보덕암을 둘러보고 진주담, 화룡담을 지나면 마하연 중창비와 공덕비가 나온다. 중창비 왼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들어가면 높이 자란 풀들이 우거진 넓은 공간이 펼쳐진다. 661년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던 마하연터다. 신라시대 선승들의 최대 수양사찰이었던 마하연은 원래 기역자형의 53칸 대찰이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쓸쓸한 폐허로 남아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애잔하게 한다. 빈터의 오른쪽으로는 목조로 된 칠성각이 그나마 외형을 유지하고 있어 세월의 만고풍상을 짐작케 한다.
금강산 내금강 마하연터 전경. 마하연은 신라시대 선승들의 최대 수양사찰이었지만 6.25전쟁 때 폐허로 변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02.© 뉴스1 금강산 내금강 마하연터 초입에 있는 마하연 중창비와 공덕비.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02.© 뉴스1
다시 걸음을 재촉해 중창비로 돌아와 올라가면 거대한 마애불이 나온다. 묘길상(妙吉祥, 국보유적 제102호)이다. 높이 40미터의 웅장한 절벽에 새겨져 있는 아미타여래좌상으로, '마하연묘길상'이라고도 한다. 고려 말기에 묘길상암을 중창한 나옹(懶翁)이 직접 새겼다고 전한다.
금강산 내금강 묘길상 원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02.© 뉴스1 금강산 내금강 묘길상과 석등. 바위에 조선시대의 문신 윤사국(尹師國)이 쓴 '묘길상'이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02.© 뉴스1
불상 높이 15미터, 너비 9.4미터이며 얼굴 높이는 3.1미터, 너비 2.6미터이다. 손가락 하나가 보통사람의 몸체보다 굵고, 두 다리의 높이는 사람의 키를 훨씬 넘는다. 마애불 옆 바위에 조선시대의 문신 윤사국(尹師國)이 쓴 '묘길상'이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마애불 앞에는 높이 3.66미터의 석등이 남아 있다. 여기서 금강산의 최고봉인 비로봉까지는 6㎞ 거리다.
만폭동 길을 따라 하산해 표훈사로 돌아와 뒤쪽으로 가면 표훈사의 말사였던 정양사(국보유적 제99호)가 자리 잡고 있다. 산의 정맥이 양지바른 곳에 놓였다고 하여 정양사라 이름 붙였다고 전한다. 고려 태조 왕건과 법기보살(法起菩薩)의 전설이 있는 방광대, 태조가 절을 했다는 배점(拜岾)이 남아 있다. 고려시대 때 1만2000의 무리를 이끌고 방광대에 나타난 법기보살을 본 왕건이 엎드려 절을 한 자리가 배점이라 한다. 왕건은 법기보살이 나타나 빛을 발하던 방광대에 절을 세우고 정양사라 했다고 한다.
금강산 내금강 표훈사 위쪽에 있는 정양사 전경. 현재 반야전, 약사전, 삼층석탑, 석등이 남아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02.© 뉴스1 금강산 내금강 표훈사 약사전 내부에 봉안돼 있는 석조약사여래상.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02.© 뉴스1원래 600년(신라 진평왕 22)에 창건됐고, 661년(문무왕 즉위년)에 중수됐다 폐사된 것을 고려 태조가 중창하고 1326년(충숙왕 13)에 중수했다. 가람배치는 반야전, 약사전, 삼층석탑과 석등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고 앞쪽 좌우에 부속 건물들이 있다. 이외에 헐성루, 영산전, 명부전, 승방 등의 건물들이 있었으나 6·25전쟁 때 소실됐다.
사찰의 중심건물인 반야전은 본존으로 법기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반야전 앞에 있는 약사전은 신라시대 유물로 추정되는 석조약사여래상을 봉안하고 있다. 6각형 평면에 6모 기와지붕을 올린 다포식 건물로, 내부 바닥에는 전돌을 깔고 6각형 불대좌를 놓았다.
약사전 앞에 있는 정양사 3층석탑(국보유적 제186호)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 정상의 상륜으로 구성되어 있다. 형태는 신라식이나 조성 양식과 수법 등으로 보아 건조 연대는 고려 초기로 추정된다. 이 탑 옆에 서 있는 석등은 고려 초의 것으로 보존유적으로 지정돼 있다.
표훈사에서 5분도 내려가지 않은 곳에 백화암 부도군이 자리 잡고 있다. 원래 이곳에는 백화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다. 서산대사가 수도하고 정진했다고 하며 모두 3개의 비석과 7개의 부도가 서 있다.
금강산 내금강 백화암터 인근에 있는 서산대사부도비.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02.© 뉴스1부도터를 뒤로 하고 5분 정도 내려가면 김동과 나옹화상의 전설이 스며있는 삼불암(三佛庵)이 한 눈에 들어온다. 고려시대 개성 출신의 부자 김동이 표훈사에서 크게 불사를 일으켰으나 장안사에 머물던 나옹선사를 시기하였다. 이에 바위에 불상 새기기를 하여 지는 쪽이 금강산을 떠나기로 하고 나옹은 전면에 3불을, 김동은 뒷면에 60불을 새겼다. 나옹의 3불은 뛰어난 조형미를 보였으나 김동의 60불은 솜씨도 조악할 뿐더러 4번째 부처의 귀를 빼먹는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러자 수치심을 못이긴 김동이 울소에 투신하여 죽었고, 이 소식을 들은 3형제도 몸을 던지자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번개와 폭우가 쏟아졌다고 한다. 다음날 비가 그치자 네 사람의 시신은 모두 바위로 변했고, 물소리는 울음소리 같아 울소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금강산 내금강 삼불암 젼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02.© 뉴스1표훈사에서 울소를 지나 명경대 가는 길을 지나 오른쪽으로 내려오면 호적한 계곡길 아래에 장안사터(국보유적 제96호)가 나온다. 장안사는 금강산의 4대 사찰의 하나로 내금강 만폭동의 유명한 명승지였으며, 금강산 장경봉 아래 비홍교(만천다리) 건너편에 그 터가 남아 있다. 신라 법흥왕 때 고구려의 승려 혜량이 신라에 귀화하면서 창건됐다고 전한다.
6․25전쟁 때 불에 타 폐사된 금강산 내금강 장안사터에는 현재 부도탑만 하나 덩그러니 남아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02.© 뉴스1 금강산 내금강 장안사터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부도탑.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02.© 뉴스1그후 여러 차례 중건과 수리가 이뤄졌고, 1842년 부원군(府院君) 조만영(趙萬永)의 보시로 300여 칸의 대찰로 증축됐다. 6전(殿)·7각(閣)·2루(樓)·2문(門) 외에 10여 채의 부속건물이 있었으나, 6·25전쟁 때 불에 타버리고 축대·비석 등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지금은 빈터만 남았지만 이곳에서 바라보는 전나무 군락과 기암연봉들은 한 폭의 그림 같다.
금강산 내금강 장안사터에서 바라다 본 봉우리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02.© 뉴스1표훈사 인근의 내강리에는 과거 금강암(金剛庵)과 장연사(長淵寺) 가 있었다. 폐사된 금강암에는 현재 사자탑(獅子塔, 국보유적 제100호)이 홀로 남아 있다. 고려 초기에 조성된 탑으로, 전체 높이는 3.87미터가량이다. 사자탑이라는 명칭은 기반부에 네 마리의 사자를 앉히고, 그 위에 탑신부를 축조한 형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사자석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한 전라남도 구례군 화엄사의 4사자석탑을 비롯해 몇 기가 남아 있을 뿐이다.
금강산 내금강 금강암터에 남아 있는 사자탑.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02.© 뉴스1이외에도 금강산의 남쪽에는 일제강점기 60여 개의 말사를 거느린 전국 31본산 중의 하나로, 신라 초기 남해왕 때 창건된 유점사터가 남아 있다. 유점사는 외금강 효운동 계곡에 세운 금강산 4대 사찰 중에서도 가장 크고 웅장한 금강산 제일의 대찰이었다. 그러나 6·25전쟁 때 파괴되어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고, 유점사로 들어가는 무지개다리와 묘향산 보현사로 옮긴 동종(銅鐘)이 보존되어 있다.
금강산의 최대 사찰이었던 유점사터 입구의 무지개다리(홍예교).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02.© 뉴스1yeh25@news1.kr
뉴스1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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