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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령鐵嶺-미수복 강원도의 명소

류지미 2023. 5. 30. 11:40

철령 鐵嶺 - 미수복 강원도의 명소

|작성자 이북도민작가 이동현

2018. 3. 4. 23:59

 

 

철령(鐵嶺)은 강원도 회양군과 고산군 사이에 있는 고개로서 높이는 685m입니다. 이 고개를 기준으로 동쪽을 관동, 서쪽을 관서, 북쪽을 관북이라 합니다.  31번 국도로 넘을 수 있으며, 중부 지방과 관북 지방을 잇는 중요한 교통로입니다.
 
고려 공민왕 때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면서 이 고개도 다시 고려 땅이 되었는데, 후에 원나라를 밀어내고 들어선 명나라가 고려에게 본디 철령 이북은 원나라가 다스렸으니 원나라를 밀어낸 자신들이 다스려야 한다며 도로 내놓으라 했습니다. 당시 실권자였던 최영은 당연히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요동정벌에 나섰는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 자체가 바뀌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철령을 넘으면 삭방(朔方)이라 하였는데 비록 고개 하나에 불과했지만 이 고개를 사이로 이쪽과 저쪽의 풍물과 민정(民情)이 서로 달라 관념상의 높이는 실제보다 훨씬 높았습니다.

201110월 북한의 철령을 방문한 외국기자의 답사기를 소개합니다.
철령-미수복강원도의 명소   이북도민작가 이동현
 

 

 

북한 백두대간에의 첫 발 – 철령 (鐵嶺)


BY ADMIN | PUBLISHED OCT 24 2014
로저 셰퍼드 번역 한영환

2011년 10월에  강원도 고산군  철령을 방문한 외국기자의 답사기

 

만약 여러분이 백두대간의 개요를 보여주는 한반도 지도를 본다면, 백두대간의 대략 중간 쯤에 남쪽을 향하고 있는 거의 쐐기 모양의 L자형 굴곡 부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작년 초 내가 평양의 김일성대학교에 가서 두 지리학 교수를 만났는데, 그들은 이 지역의 어느 곳이 백두대간의 정확한 중간 지점으로 바위에 표시가 있었다고 말했다(북한에서는 백두대간을 백두대산줄기라고 부른다). 그리고 덧붙여 그들은 그 표시가 해발 5-600미터에 있었는데 일제 강정기 때 일본인들이 그것을 징으로 뭉게버렸다고 말했다. 그 두 교수는 이 중간 지역을 철령이라고 불렀다. 철령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신산경표에는 표시되어있지 않다. 나의 북한 인솔자들도 우리가 가려는 곳에 대해 전혀 몰랐다. 그들중 이전에 이 지역에 가본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쾌활한 성격의 운전기사 한 씨도 백두대간의 산으로의 운전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원산은 동해안에 있는 북한의 항구 도시이다. 외형은 북한의 다른 도시와 비슷했다. 도시 도로는 아스팔트 포장이 되었으나 평평하지 않았고 패인 곳도 있었으나 깨끗했다. 건물들의 칠은 바랬고 일부 흰 페인트가 갈라진 곳도 있었으나, 닫힌 창문 밖에 고운 꽃을 담은 화분들이 늘어선 곳도 있었다. 북한 도시에는 환상 교차로(로터리)가 많았는데, 늘 그렇듯이 큰 시멘트 게시판에 위대한 지도자들의 정책을 찬양하는 글이 적혀 있었다. 때때로 이런 로터리에는 곤색 제복을 입은 예쁜 아가씨가 교통을 정리하고 있었다. 정확한 수신호로 차에게 방향을 지시하는 그녀들은 잘 훈련되어 보였다.

 

이날 아침 일찍 우리가 떠난 호텔은 10층이었는데, 시금치 색과 비슷한 녹색으로 칠해졌다. 호텔 방에서 조용한 여흥만의 바다가 내려다 보였다. 부두에는 검은 굴뚝을 가진 낡은 배 몇 척이 밧줄로 서로 묶여서 흔들리고 있었다. 일부 해안에는 노랗게 단풍이 들고 있는 큰 나무들이 늘어서 있어 운치가 있었다. 그 나무들 밑으로 색이 바래가는 흰 콘크리트로 만든 배를 메는 기둥들이 늘어서 있었다. 이곳에서 재미로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한가로이 낚시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때때로 아이들도 온다고 했다. 할 일이 없을 때 탐욕을 버린 한가로운 마음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원산을 떠난 뒤 논들이 나타났는데, 이미 수확이 끝나 짚단들이 세워져 있었다. 그들 뒤로 산들이 지평을 이루고 있었고, 다가오는 비구름으로 인해 검게 보였다. 경치가 초현실적이었다.
 
우리가 철령에 도달하기 전에 들른 첫 작은 읍은 고산인데, 원산에서 서남쪽으로 약 30 킬로미터 떨어져있었다. 중심 거리만이 아스팔트 포장이 되었으나 크게 갈라진 데가 있었다. 우리가 비포장 도로로 접어들어갔는데, 이곳은 장마 때 진창이 될 것으로 보였다. 지역 위원회 건물 밖에 정차한 뒤 황성철이 들어갔다가 얼마 뒤에 우리를 안내할 현지 관리 한 사람을 데리고 나왔다. 그는 내가 본 중에서 가장 몸집이 작은 사람이었다. 그의 체구가 아주 작기 때문에 그를 조수석에 앉은 황철영의 옆에 앉혔다.

 

그 날 오전 우리가 철령을 향해 꼬불꼬불한 비포장 도로를 달려갔다. 과거 일인들이 백두대간의 정기를 끊으려고 그 바위 능선을 자르려고 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지만, 그것이 엄청난 작업이어서 실제로 그런 일을 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내가 차를 타고 가는 동안 가져보았다. 얼마 뒤 우리가 철령에 도착했다. 고개 꼭대기로 비포장 도로가 나있었는데, 그곳에 군인 초소가 있었다. 우리가 있어도 군인들은 태평하게 있었으며, 우리도 주위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사진을 찍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민간인과 더 많은 군인들을 태운 트럭들이 고개를 넘을 때마다 초소 앞에서 정차했다. 심지어 일부 사람들은 고개 꼭대기로 걸어가기도 했다. 사람들은 긴 여행으로 피로해 보였다. 고개의 한편에 주차장이 있었으며 그곳에 흰 콩크리트 게시판이 있었는데, 붉은 색으로 쓰여진 한글 게시문이 있었다. 한국전쟁 때 이 격전지에서 희생된 많은 전사자들에 대한 김일성 수령의 격려가 적혀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일제 강정기 때 일본인들이 백두대간의 정기를 끊으려고 시도했다는 따위의 산에 관한 내용은 없었다.
 
우리 모두는 나무 그늘 밑에 둘러 앉아, 평양 소주와 맛좋은 대동강 맥주를 곁들이면서 점심을 먹었다. 서둘러 마련한 점심은 밥, 김치, 불고기였다. 점심 뒤 우리는 백두대간 능선으로 걸어 올라가서 장수봉(1,053m) 쪽으로 갔다. 오래 된 산길 입구 옆에는 소나무들이 있었으며, 그곳에 원색으로 칠한 호랑이와 곰의 모형이 있어 전략적으로 중요한 이 고개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주고 있었다. 지형은 인상적이지 않았지만, 이곳은 내가 북한에서 바로 백두대간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곳이어서 감개가 무량했다.

 

 30분 뒤 수확이 끝난 작은 채소밭이 나타났다. 이 밭은 TV 안테나를 관리하는 작은 집의 거주자들이 여름 동안 채소를 얻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서의 360도 조망이 훌륭하여 철령 고개를 포함한 능선을 촬영하기에 좋았다. 우리의 현지 안내자는 그 지역을 잘 알고 있어, 백두대간의 주요 지점들을 지적해주었다.  2 km 서쪽으로 풍류산(1,058 m)이 있는데, 그것은 40 km 되는 좁은 L자형 굴곡의 동쪽 끝이다. L자형 굴곡은 남쪽으로 뻗어 새포에 도달한다. 날씨가 청명했기 때문에 그는 또한 멀리 서쪽에 있는 추애산(1,528 m)을 가리킬 수 있었다. 이 산은 L자형 굴곡의 서쪽 끝인데, 우리 위치에서 단지 15 km 떨어져있었다. 우리의 남쪽으로 북한강의 수원을 이루는 지형을 바라볼 수 있었다. 이 북한강이 나중에 양평의 한강지맥의 끝에서 한강에 합류하게 된다. 한국의 강산을 산 능선들과 강들이 연결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새삼스럽게 감회를 느꼈다. 나는 동남 쪽으로 약 70 km 떨어진 곳에 있을 금강산의 날카로운 봉우리들을 상상해 보았다. 약 한 시간 더 우리는 능선 위에 머물러 따스한 가을 해와 멀리 펼쳐지는 조망을 즐겼다. 그 뒤 우리는 철령으로 걸어내려가 전쟁기념비 앞에서 단체 기념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우리는 자동차를 타고 꼬불꼬불한 산길을 따라 고산으로 내려갔다. 이번에는 대부분의 구비에서 정차하여 차에서 내려서, 백두대간의 산허리를 덮고 있는 밝고 고운 색의 단풍을 구경했다.
 
 
이날 우리에게 아직 몇 시간이 남아있어 예정된 길을 우회하기로 결정했다. 황성철이 내가 불교 문화에 관심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현지 안내자가 구룡리의 작은 마을 근처에 큰 옛 절터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얼마 뒤 우리가 석왕사지(釋王寺址: 역주-이성계가 꿈에 석가래를 본 것을 그가 왕이 될 꿈이라고 해몽해준 무학대사를 위해 창건된 절로 알려지고 있다)의 정문에 도착했다. 절터 안으로 들어가는 차도의 양 옆에는 큰 나무들이 서있었다. 우리는 빈 주차장에 주차했다. 한편에서 일단의 남녀가 들놀이 파티를 벌리고 있었다. 큰 카세트 플레이어에서 음악이 요란하게 흘러나왔는데, 그것은 80년대에 ghetto blaster(역주-대형 휴대용 라디오 카세트)라고 불리었을 것이다. 스피커에서 잡음이 났으며, 때때로 카세트의 속도가 느려져서 음악의 맥이 풀렸다.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은 흥겹게 춤을 추었다. 그들의 한국식 춤은 큰 학이 날개를 얌전히 펼치고 땅을 걸어가는 모습이었다.
 

우리는 걸어서 절터의 첫 문을 지나갔는데 잎이 노래진 아주 큰 느티나무가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아래에 있는 설명판에 따르면, 절이 창건되던 같은 해인 1336에 식목된 것으로 북한의 국가 자연기념물 제208로 지정된 것이다. 나무 줄기 둘레가 거의 8 m이고 높이가 25 m나 되어 위압적으로 보였다. 그것이 한국에서 가장 큰 느티나무라고 한다. 

석왕사 절터로 갔는데, 지금은 건물이 거의 없고 터만 남아있다. 유일하게 남은 건축물은 1394년에 지어진 불이문(不二門)뿐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지은 종각과  복원된 사천왕문이 유일한 다른 건물이었다. 그런데 이 사천왕문에는 사천왕들의 조상이 없었다. 법당과 경당이었던 곳에는 주춧돌들만이 남아있었다. 나는 이 절터의 현황에 관심이 있을 사람이 남한에 있을 것으로 여겨 가능한 한 많은 사진을 찍었다. 우리가 절터를 떠나려고 할 때 절터 안내자이기도 한 현지 여인을 만났다. 우리가 그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에도 여흥을 즐기는 사람들의 춤판은 계속 신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녀에 따르면, 이 절의 아주 유명한 스님은 무학대사이며, 한때에는 9개의 전각이 절터를 메우고 300명의 비구와 200명의 비구니가 머물고 있었다고 했다. 이 절은 한국전쟁 때 미군의 폭격으로 소실된 뒤 복원되지 않고 있다. 북한에는 재발견되어야 할 많은 불교 유적지가 있을텐데, 나는 미래의 어느 날 그것들을 볼 수 있기를 바랬다.

 

우리가 투숙한 원산의 호텔로 돌아왔을 때 거의 어두워졌다. 내가 금강산 밖의 백두대간에 첫 발을 디디는 등 하루 종일 바쁘게 보낸 날이었다. 나는 내가 북한에 머무는 동안 이런 특전이 계속 베풀어지기를 바랬다. 사실 나는 나의 북한과의 관계가 오래 지속되기를 원했다. 그런 기분은 내가 이번의 첫 백두대간 탐방에서 얻은 좋은 느낌에 고무된 것이리라. (번역 한영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