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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星州), 절강시씨(浙江施氏) & 절강 서씨(浙江 徐氏)

류지미 2023. 7. 30. 19:01

 성주(星州) 수륜면(修倫面) 형곡동(兄谷洞)노시가(老施家)

시문용(施文用)은 절강시씨(浙江施氏)시조이며 자는 종록(宗祿)이고 호는 명촌(明村)이다. 1572년 중국 절강성 포강(浦江)에서 탄생, 임진왜란 때 장군으로 조선에 나와 많은 전공을 세운 후 귀화하여 1601년 성주군 수륜면 형곡동에 정착 조정에 나가 많은 업적을 남긴 후 1643 형곡동에서 별세했다.

 

약 400여년전 시문용께서 정인홍의 도움으로 합천군 가야면 야천동으로 장가를 가시고 1601년 합천에서 성주군 수륜면 형곡동(보월동)에 와서 사시며 큰 아들을 낳으셨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보월동에서 자리를 잡고 사신 곳이 어디었을까? 

 

시씨들의 과거 집성촌인 고령군 운수면 화암동에서 성주군 수륜면 보월동(형곡동)을 가려면 먼저 화암동에서 대가천의 작천교를 건너서 200여 미터 쯤 가면 전 전두환 대통령 부인 이순자 여사의 생가라고 잘 알려진 *남은동(南隱里) 마을이 있으며, 마을을 우측으로 돌아 작은 개울다리를 건너면 그곳이 보월동(형곡동) 1동이며 현재 시씨들이 사는 마을은 보월2동이다. 

 

다리를 건너면 집들이 몇가구 살고 있고 우측으로 100여 미터쯤 가면 서남향으로 산세가 잘 내려와 있으며 그 곳에 지금은 폐교가 된 학교(월남초등)가 있다. 이곳 주위를 보월1동 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거의 노시개 라고 부른다. 사연을 들어본즉 과거 시문용께서 사실 때 시씨 노인이 사시는 집이 있다는 의미로 노시가(老施家)라고 불러 왔으며 지금은 부르기 좋게 노시개라고 부른다한다. 

 

 

인조 1년 고향에 돌아와 살다가 인조 14년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할 때 청 태종이 조선에 있는 명나라 장수들을 잡아 보내라고 명하자 인조는 반대로 시문용등을 다른 곳에 피신케 했다. 이때 시문용과 한 고향에서 형제와 같이 지냈으며 조선에 같이 나와 많은 전공을 세운 유격파총 서학(徐鶴)이 시문용(施文用)과 이 땅에 머물 때 같이 남아 있었는데 이때 같이 성주군 용암면 군성산으로 들어가 은둔 생활을 하게 된다. 두 분은 군성산에 대명단(大明壇)이라는 단을 모우고 초하루 보름마다 같이 조복입고 대명단에 올라 조선의 평안과 조국의 중흥을 기원 했는데 그 대명단이 지금도 남아있다.

 

군성산정에 대명단을 쌓고 조국의 중흥을 기원하면서 많은 저서를 남기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형곡동에 자리잡고 여생을 보낸 후  1643 형곡동에서 별세, 형곡마을 뒷산, 지금의 묘지에 영면하다. 

 

절강 시문용의 묘(浙江施文用之墓)

대종묘사

일시:음력 10월 첫째주 일요일 10:00

장소:경북 성주군 수륜면 보월리 아랫맏질(시조할아버지 산소)

절강 시문용의 묘(浙江施文用之墓)

소재지 : 경북 성주군 수륜면 보월리 아래맏질 뒷산

 

 

 

절강시씨(浙江施氏)

 관향(貫鄕)의 유래

절강시씨(浙江施氏) 시조 시문용(施文用)은 중국 절강성 포강(浦江)에서 태어나 임진왜란 때 장군으로 조선에 원군으로 왔다가 성주에 정착하여 절강시씨 본관이 연유한다. 

 

시씨(施氏) 는 본래 중국 오흥에서 계출된 성씨로서 주나라 경왕(敬王:제26대 임금, 재위기간: BC 519 ∼ 476) 때 성유(聖儒) 공자(孔子)의 제자였던 시지상(施之常)의 후예로 전한다. 

 

시씨는  중국 은(殷)나라 7민족중의 하나인 희(姬)라는 성으로 내려오다 약3100경 희발(姬發)이 주(周)나라를 세웠고(부 희창 문왕 父 姬昌文王)무왕의 8대손 노혜공(魯惠公)의 아들로부터 시씨가 탄생했고 노혜공의 8대손이 공자72제자 중의 한분인 시지상(施之常)이있고  삼국지 저자 라관중(羅貫中)의 선생이며 수호지를 쓴 시내암(施耐암)이 있으며 중국 호북성(胡北省) 은시(恩施)에 시가 왕국이 있었음. 진한당송(秦漢唐宋)에걸처 유명인사가 많이 배출되었고 임진왜란 당시에는 시윤제(施允濟)가 병부시랑(국방차관)으로 있으며 조선에서 정곤수(鄭昆壽)일행이 파병을 요청하기위해 북경에 오자 접반사가 되어 조선의 딱한 사정을 듯고 군대를 보내는 일에 힘껏 도왔다는 사실이 정곤수 장계에도 소개되고 정조대왕도 언급한바 있다.(정조17년7월17일) 

 

시윤제의 아들 시문용은 임진왜란 정유년에 장군으로 조선에 나와 많은 전공을 세우고 철군 할 때 병으로 남았다가 의병3천명을 모집 일본군과 싸워 선조로부터 의병도대장의 직책을 받았고 집에 앉아 영의정을 지냈다는 정인홍이 시문용은 문장과 무예에도 뛰어나고 천문 지리 의술 등등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이런 사람은 만금을 주고도 구할 수 없고 이런 분이 조선에 꼭 필요하다며 간곡히 권유 하여 이 땅에 머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601년 정인홍의 도움으로 성주군 수륜면 형곡동에 정착 선조 35년에 중추부사의 벼슬을 받았고 광해군 7년 10월5일 광해군의 부름을 받고 올라가 정식 왕실풍수가 되어 지금은 없는 인경궁과 5대궁의 하나로 서울에 남아 있는 경희궁(慶熙宮)의 터를 잡고 지었으며 제도 개혁 등을 하여 몇 년 사이에 한양을 전쟁이전 보다 활발한 한양으로 만들었으나 인조반정 때 정인홍의 사람이라 쫓겨나고 말았다고 기록되어있다. 

 

인조 1년 고향에 돌아와 살다가 인조 14년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할 때 청 태종이 조선에 있는 명나라 장수들을 잡아 보내라고 명하자 인조는 반대로 시문용등을 다른 곳에 피신케 했다 이때 시문용과 한 고향에서 형제와 같이 지냈으며 조선에 같이 나와 많은 전공을 세운 유격파총 서학(徐鶴)이 시문용이 이 땅에 머물 때 같이 남아 있었는데 이때 같이 성주군 용암면 군성산으로 들어가 은둔 생활을 하게 된다 두 분은 군성산에 대명단(大明壇)이라는 단을 모우고 초하루 보름마다 같이 조복입고 대명단에 올라 조선의 평안과 조국의 중흥을 기원 했는데 그 대명단이 지금도 남아있다.

 

대명단(大明壇)

성주군 용암면 문명리 대명동 소재

 

 

 이때부터 마을 이름이 대명동이 되었다(현문명동). 그 후 시문용은 형곡동으로 돌아가 1643년에 별세했고 서학은 절강서씨 시조가 되어 그 마을에 정착하여 후손들이 살고 있다.

 

 

 

 

 

절강시씨(浙江施氏) 시조 시문용(施文用, 1572년 ~ 1623년)은 명나라 병부시랑을 지낸 시윤제의 아들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행영중군으로 참전했던 무장이다.

 행적

그는 전쟁이 끝난 후 부상으로 인해 명나라로 귀국하지 않고 경상도 성주에 정착하였다. 시문용이 조선에 정착하면서 국내 절강 시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정인홍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정인홍의 주선으로 사촌 누이인 합천군의 장함의 딸과 혼인하여 자식들을 두었다. 인조반정 이후에 쓰여진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전 의금부 도사 양홍주가 조카를 억지로 외국인에게 시집보냈다고 정인홍을 탄핵하기도 했다. 반면 선조실록에는 정인홍이 강제로 시집을 보낸 것은 황당한 무고라고 반박하면서 그저 정인홍이 절강사람들을 동향인으로 잘 대우한 것일 뿐이며, 장함의 일가붙이가 멀쩡히 살아있는데 강제 결혼이 웬말이냐고 반박하는 의령진사 오여온의 상소가 수록되어 있다.

시문용은 땅을 잘 보는 것으로 천거되어 선조로부터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풍수지리에 능했기 때문에 광해군이 큰 관심을 보여 성주에 살고 있던 그를 한양으로 자주 불러 의견을 물었다. 이후 광해군의 총애를 받으며 개혁정책에 참여하였으며, 조선의 군사전술에 많은 조언을 하였다. 하지만 광해군 일기에 인조반정 이후에 풍수지리로 백성들을 괴롭힌 죄로 처형당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것이 인정되어 영조 때 복권, 병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정조 때 그 후손들을 천역에서 면제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후손들은 시문용이 죽지 않고 성주로 돌아와 저술활동을 하여 병학기정, 감여지남, 의복묘결 등을 저술하였고 1654년에 천수를 누리다 생을 마감하였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시문용의 후손 절강 시씨들은 서학의 후손 절강 서씨들과 함께 성주군 용암면 대명마을에 거주하고 있었으나 절강 시씨들은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보월리 맏질마을, 경상북도 고령군 운수면 화암리 꽃질마을로 거주지를 옮겨가면서 현재 대명마을에는 절강 서씨들만 거주하고 있다.  현재 성주군 용암면 대명마을에는 두 장수가 고국 명나라를 기리기 위해 매달 초하루에 사배를 올린 재단인 대명단이 남아 있으며 두 장수를 추모하기 위해 1834년(순조 34) 유림에서 건립한 풍천채도 남아 있다.

 
[1] 이때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함께 조선에 남은 인물이 친구인 서학이다. 서학 역시 성주에 정착하여 국내 절강 서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2] 대명(大明)이라는 마을 이름이 이들의 고향인 명나라를 뜻하는 이름이다.
 

풍천재(風泉齋 ) 와 유허비 [遺墟碑]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문명리 1258번지, (대명마을뒤 산기슭 입구)

*풍천재는 1834년(순조 34), 유허비는 1835년에 건립됨

절강 시문용(浙江施文用)의 유허비 [遺墟碑]

[*시문용(우측), 서학(좌측)의 유허비]

 

절강시씨(浙江施氏) 는  상당한 양반혈통 집안으로 영남학파들이 시씨를 존경하며 매우 따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왕이 직접 세워준 사당이 있을 정도로 명문가이다. 후손들은 재야에 파묻혀 사는걸 좋아했는지, 혹은 시문용의 유언 때문인지 조선시대에 시문용 이외의 유명 인물은 없다. 고령군에서 고령 땅 10분의 1을 차지할 정도의 위세를 보였으며, 대구광역시에서 가장 큰 규모의 지주였다. 구휼미를 무상으로 푸는등의 구제 활동을 많이 실시하여 당시 고령 주민들은 "시(施)씨가 나랏님이다" 라고 하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막대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는 바람에 예전의 위세를 자랑하지는 못하고 있다.

 

 施씨

  • 시검교(스젠차오):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
  • 시랑(施琅)
  • 시조기(施肇基, 스자오지): 중화민국의 외교관.
  • 시명덕(施明德, 스밍더): 대만의 정치인.
  • 시문용(施文用): 우리나라 시(施)씨의 시조
  • 시백우(施柏宇): 대만의 배우
  • 시영준(施榮埈): 한국의 성우

 

 

浙江 徐氏 절강 서씨

중국 동남부 해안에 있는 저장성(절강)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귀화 성씨이다. 시조는 중국 명나라 저장성(절강) 출신인 서해룡(徐海龍)이며, 중시조는 서해룡의 증손자인 서학(徐鶴)이다. 서학은 명나라군 무관으로 유격파총(遊擊把摠)에 임명되어,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던 해 조선에 지원군으로 파병되어 왜군과의 전투에서 여러 전공을 세웠다. 서학은 1598년 정유재란 이후 명나라로 철군하지 않고 경상북도 성주군에 정착하여 뿌리를 내렸다. 이후 후손들이 한국에서 약 400년 간 절강서씨(浙江徐氏)의 혈맥을 이어오고 있다.

집성촌

서학이 정유재란 후 명나라에 귀국하지 않고 조선에 정착한 곳으로, 후세까지 이어서 살아온 절강 서씨의 집성촌이다. 현재는 절강 서씨 2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서학과 함께 조선에 귀화한 명나라 장수 시문용의 후세들도 본래 같은 마을에 살았지만, 절강 시씨(浙江施氏)들이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보월리 맏질마을, 경상북도 고령군 운수면 화암리 꽃질마을로 옮겨가면서 현재는 절강 서씨들만 거주하고 있다. 마을 명칭은 ‘대명(大明)마을’로 서학과 시문용이 고국 명나라를 생각하며 지었다.[1] 같은 시기에 조선에 귀화한 명나라 장수 두사충 대구광역시 중구에 정착하면서 지어진 대명동과 지명 유래가 같다.

이 마을 입구에는 1834년에 조선 사림들이 서학과 시문용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풍천재(風泉齋)’와 이듬해 1835년에 세운 유허비가 있다. 마을 뒤편 군성산에는 서학과 시문용 두 장수가 고국인 명나라의 중흥을 기원하며 북망사배(北望四拜)를 올린 장소

 인물

  • 서학(명나라)(徐鶴): 절강 서씨 중시조. 명나라 무관(武官) 유격파총(遊擊把摠) 역임.
  • 서헐세(徐歇世): 서학의 장남. 조선 종8품 문관(文官) 승사랑(承仕郞) 역임.
  • 서종길(徐宗吉): 서학의 손자. 조선 정3품 문관(文官) 통정대부(通政大夫) 역임.
  • 서의필(徐義必): 서겸세(徐士世)의 장남. 효행으로 명성을 떨침.
  • 서가행(徐嘉行): 조선 종3품 무관(武官) 훈련원부정(訓鍊院副正) 역임.
  • 서응명(徐應明): 조선 종9품 문관(文官) 참봉(參奉) 역임.
  • 서반석: 성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