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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대명동(大明洞) 풍천재(風泉齋)

류지미 2023. 7. 30. 19:32

성주 대명동(大明洞) 풍천재(風泉齋)

 

시문용施文用)과 서학(徐鶴)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풍천재(風泉齋)

慶尙北道 星州郡 龍岩面 文明里 大明洞마을

문명리 1258번지(도로명 주소 문명1길 198-6)

 

가야산(伽倻山)에서 동쪽으로 달려 성암산(聖巖山)이, 성암산의 가운뎃 줄기가 일어나 함박산(含璞山)이,

그 함박산의 왼쪽 지맥이 다시 솟구쳐져 군성산(君聖山)이다. 군성산 줄기의 여러 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왼쪽으로 용이 서린듯 청룡 지맥이 길게 꿈틀거리며 내려오고, 오른쪽으로는 백호 지맥이 마치 청룡과 여의주를 다투듯 의젓하게 걸터앉아 있으니, 그처럼 여러 겹의 지맥들이 구불구불 에워 두른 곳에 터잡은 대명동은 그야말로 내맥(來脈) 하나만큼은 전혀 흠잡 을 데가 없다. 은둔처나 피난처, 도피지로는 가히  신기하게 훌륭한 내맥도(圖)를 보유한 명당이다. 

 

놀랍게도 그 터를 처음 점정(占定)한 사람은 중국 명나라 지관이었던 시 문용(施文用, 1572-1643)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조 광해군이 임진란으로 폐허가 된 왕도(王都)를 재건할 때, 경상감사에게 "궁궐을 짓는 큰 역사( 役事)가 있으니 그곳에 사는 시문용을 올려보내라"는 교지를 내릴 정도로 유명했고, 그에 따라 인왕산 밑에 인경궁 터를 직접 잡기도 했던 그가 그런 골짜기에 삶을 의탁하게 된 사연이 ~~~...

시문용,서학(좌)의 유허비와 풍천재 

 

임진왜란에서 이여송이 평양 등을 수복했고 5년뒤 정유재란 때는 시윤제가 아들 시문용을 장군으로 파견하여 1597년 6월 천명의 절강성 군사를 직접 거느리고 마귀(麻貴) 제독을 따라 나와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도 말하는 9월 직산 (소사평)전투에 참전하고 12월 울산전투에 참전하여 절강병이 전공을 세운 기록이 있고 1598년1월. 람방위(藍芳威)가 3300명의 절강성 군사를 거느리고 추가로 나오자 시문용은 이 부대를 실질적으로 통솔하는 행영중군(行營中軍)으로 편성되어 공주 공산성에 주둔하였는데 후세 백성들이 당시 군대가 공산성에 주둔하며 왜적을 막아주고 민페가 없었다고 송덕비를 세워 현재도 명 삼장비가 공산성에 남아있다 .

 

1599년 4월 마귀제독이 선조와 작별인사를 하고 철수할 때 시문용은 병으로 남게 되고 이때 의병 도 대장을 지냈고 영의정에 오른 정인홍(鄭仁弘)의 간곡한 만류로 조선에 귀화하게 되었다. 여러 기록에 소개가 되어 있으며 광해군과 정인홍이란 책자에 소개된 내용과 기록들을 옮겨 보면, 정인홍이 시문용을 보니 시문용은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이다.

 

문장과 무예에도 뛰어나고 불교 유교에도 박식한 것은 물론이고 천문 지리 의술 군사 등 통달하지 않은 데가 없는 사람이라 고려 초 쌍기가 중국에서 고려에 사신으로 따라 왔다가 병으로 남은 후 귀화하여 과거 제도를 도입하는 등 고려의 기틀을 잡은 사실을 기억하고 시문용도 그런 역할을 해 주리라 믿고 조선에 귀화를 권유했으며 시문용은 정인홍의 인품에 감동하고 이런 사람이 알아주는 조선에서 자기 재주를 마음껏 펼 수 있겠다고 판단하고 이 땅에 머문 것으로 되어있다 .

 

정인홍과 시문용이 친밀한 사이였다는 기록은 여러 곳에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선조35년 이시익이란 자가 정인홍은 백성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임진왜란 때 장함이란 자 내외가 일본인에게 죽고 외동딸만 남았는데 정인홍이 강제로 시문용에게 시집보내어 살고 있다고 상소하니,,, 선조 35년 9.25일자 경상도 오여은이 장문의 상소를 올려 정인홍은 사람 중에 봉황인데 이귀가 이시익과 짜고 정인홍을 모함하고 있으며  장함의 어미가 있고 친척이 있는데 강제로 시문용에게 시집보냈다함은 모함이라고 한 내용이 있으니,,, 정인홍과 시문용의 관계를 알 수있다. 또 정인홍의 문도 고대라는 사람이 쓴 책 고대일록 중에 선조35년 윤2월9일 정인홍이 오후 친우들과 작별하고 성주 시문용의 집에 가서 자고 가는 내용이 있고 수일간 같이 다니며 개평(介坪)에 가서 노 원장과 강 목사를 같이 만나기도 한 내용이 있다.

 

정인홍의 도움으로 합천으로 장가도 들고 성주 땅에 정착한 시문용은 선조 35년에는 첨지중추부사의 벼슬을 받았다.

1615년 정인홍의 추천으로 광해군 7년 10월5일 광해군의 부름을 밭고 11월1일 한양에 도착한 실록기록이 있고 몇 차례 검증을 거친 후 먼저 궁궐터를 잡아 궁궐 짓는 일에 참여했고 국가 개혁 작업을 한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정인홍 등이 처형될 때 시문용도 처형 되었다고 하나 실제는 처형되지 않은 사실이 실록에서 확인되고 고향에 내려와 72세에 별세한 역사들이 있다. 특히 인조 14년에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할 때 조선에 나와 있는 명나라 장수들을 잡아 보내라 하자 인조는 시문용 등을 다른 곳으로 피신케 할 때, 시문용과 한 고향에서 나와 여러 곳에서 전공을 세웠고 특히 곤양에서 왜적을 대파한 기록이 있는 유격파총(遊擊把總)서학(徐鶴)은 시문용이 조선에 머물 때 시문용과 같이 성주군 용암면 군성산 아래 깊숙이 들어가 은거하면서 마을 뒤 군성산(君聖山)에 대명단(大明壇)을 마련하여 초하루 보름마다 조복을 입고 단에 올라 북수4배를 올리고 조선의 평안과 조국의 중흥을 기원 했다는 기록이다.

 

시문용은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가지 못하는 조국 고향산천을 그림으로 그려 놓고 보며 때론 술을 마시며 눈물지었다는 기록이 매산 홍직필이 쓴 유허비문과 오경원(吳慶元)이 쓴 소화외사(小華外史)에도 기록이 남아있으며 시인 이은상 씨는 수십 년 전 동장 신문에 시문용의 역사를 소개하면서 이 시대 나가있는 동포 중에 시문용처럼 조국을 생각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라는 글을 썼다. 시문용이 살던 이 마을이 그때부터 이름이 대명동(大明洞)이 되었고 대명단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다.

 

대명단(大明壇)

성주군 용암면  문명리 대명동 소재

매년 봄이면 대구 성주 등지에 사는 절강 시씨와 서씨 후손들이 모여

나라 사랑하는 숭고한 뜻을 이어 받기위해 4배의 의식행사를 계속 해오고 있다

경북 성주군 용암면 대명동(大明洞) 소재 유허비(遺墟碑)와 풍천재(風泉齋)

시문용(施文用, 우), 서학(徐鶴, 좌) 

(시문용과 서학을 기리기 위해 유림의 도움으로 지은 풍천재와 홍직필에게 글을 받아 세운 유허비)

 

이 때 부터 마을 이름이 대명동이 되었고 그 후 시문용은 청나라와의 관계가 정리되자 원래 살던 마을 형곡동으로 돌아가고 이 마을에는 지금 서학 후손들이 살고 있다

 

인조는 시문용에게 별세 때까지 중추부사의 록을(월급)지급하게 하여 고향으로 내려 보낸 기록이 있다

 

 

대명동에 들어간 역사

 

시문용(施文用은 인조원년에 경북 성주 수륜면 형곡동 고향으로 돌아와 살다가 인조14년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할 때, 청 태종이 조선에 나와있는 명나라 장수들을 잡아 보내라고 하자 인조는 시문용 등을 더 깊숙한 곳에 은거하게 한다. 이때 시문용은 임진왜란 때 한 고향에서 형제처럼 지냈으며 조선에 나와 여러 곳에서 많은 전공을 세우고 특히 곤양에서 왜적을 대파한 유격파총 서학(徐鶴)이 ,시문용이 부상으로 조선에 남았을 때,  같이 남아 있게 되어 같이 성주군 용암면 군성산으로 들어갔다.

 

시문용과 서학은 마을 뒤 군성산(君聖山) 중턱에 대명단(大明壇)을 쌓고 매월 초하루 보름마다 조복을 입고 단에올라 청정수를 떠놓고 조선의 평안과 조국의 중흥을 기원했으며 시문용은 가지 못하는 고향 산천을 그림으로 그려놓고 조석으로 바라보며 때론 슬픔을 이기지 못해 술을 마시고 눈물을 지었다는 기록이 유허비문과 소화외사에 기록되어 있다.

 

후손들에 의하면  광해군의 실각과 함께 성주군 수륜면 보월리 '아래맞질'마을로 내려온 시문용은 자연과 술을 벗삼아 여생을 살다가 1643년(인조 21년) 세상을 떠나 마을 뒷산에 안장되었다. 그 후 그의 후손들은 맞질마을과 고령 꽃질마을 등으로 옮겨갔다.

시문용은 이곳에서 많은 후학을 가르치고 병학기정 감여지남 의술 병법에 관한 책을 쓴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1834년 유림에서 풍천재를 세우고 이듬해 유허비를 세웠다.

 

명나라가 망하고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의 압박이 거세자 첩첩 산중에 숨어 살아야 했던 적은 인구의 성주 절강시씨 후예들은 200여년 후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에도 또 다른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일본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지원한 명나라 장수의 후예들에게 항상 질시와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다”고 후손들은 회고한다.  

 

유림의 도움으로 세워진 염수재(念修齋)(고령 운수 대평동 소재)

모명재 곁에 별묘를 세워 시문용을 불천위(不遷位)로 봉안함

 

위에 뒤편으로 보이는 묘가 시문용의 묘이며

아래의 묘는 당시 이역만리 중국에서 따라와 시문용을 평생 모신 마부의 묘이다

외로운 영혼 앞에 매년 시문용의 묘사 때는 한잔 술을 부어놓고 그 영혼을 위로 해주고 있다

 

* 보월리(甫月里)

보동(甫洞)과 월촌(月村) 마을을 이름하는 보월리(甫月里)는 까치산에서 흐르는 계곡이 대가천에 합류하는 부위를 중심으로 별뫼(星山,230m )와 달뫼(月山,200m)주변과 그 북쪽에 위치하면서 탑안(塔內.洞), 새터(新基,새뜸), 보동(甫洞,보리골, 귀암, 귀만), 월촌(月村), 웃맏질(上兄谷) 아래맏질(下兄谷) 로 구성되어 있다.

 

탑동에는 5.1m 높이의 통일신라시대 3층석탑(지방유형문화재 119호)이 있고 월촌에는 폐교된 월남초등학교가 있었다.

성주보월동삼층석탑 [星州甫月洞三層石塔]

경북 성주군 수륜면 보월리 852

넓은 절터에 많은 석재들이 산재하고 있어 상당한 규모의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보임.

경상북도(慶尙北道) 성주군(星州郡) 수륜면(修倫面) 보월리(甫月里)

 

웃맏질·상형곡(上兄谷) / 아래맏질·하형곡(下兄谷)

 수륜 형곡동(兄谷洞) 마을은 북쪽으로는 용암면 상신리와 접하고, 남으로는 고령 운수면과 접한다.

중국의 春秋時代 施伯의 후손인 明나라의 行營將軍 施文用이 壬辰倭亂 때 援軍으로 왔다가 戰後에 이곳에 정착함으로써 逝江 施氏의 集姓마을을 형성하였다. 이곳에 살던 형제 중 아우가 분가하여 아래 마을로 내려가게 되자 형이 살던 곳을 兄谷이라 하였다.

 

그후 세대가 늘어남에 따라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上兄谷, 혹은 웃맏질이라고 하고, 동생이 분가해 나간 곳을 下兄谷, 혹은 아래맏질로 구분하여 부르게 되었다. 

 

현재 맏질에는 逝江 施氏 12호 25명, 星州 李氏 7호 15명을 비롯한 29가구, 60명이 거주하고 있다. 대부분 미작중심의 농업을 영위하였으나 근래에 들어와 참외농사 6호, 축산농 5호가 나타나게 되었다. 

형제는 시문용의 아들 영건과 영달 형제를 지칭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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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용((施文用)과 이사룡(李士龍)

 

이사룡은 성산이씨(星山李氏)이며 1612년 광해 4년에 태어나 1640년 인조 18년 28세의 나이로 돌아가신 의사(義士)이다.

시문용에게 병법을 배운 대표적 인물이 이사룡(李士龍. 성산이씨)이다.  

 

시문용이 많은 후학을 가르칠 때 이사룡도 시문용에게 글을 배웠다는 이야기가 시씨 문중에 전언으로 내려오는 바, 시문용이 인조반정 때 처형되지 않았다는 또 하나의 확실한 반증이 될 수 있겠다.

 

당시 광해군은 명나라가 쇠퇴하고 청(淸)나라가 일어나자 명나라는 이미 지는 해이고 청나라는 뜨는 해와 같아서 명나라와의 은혜는 있지만 정세를 냉정히 판단하고 청나라와도 손을 잡는 중립노선 외교를 폈었다. 이에 대해 선조(宣祖)의 손자인 종(倧)이 은혜의 나라 명나라가 있는데 청나라와 손을 잡는 광해군은 처단해야한다는 외에 두가지 죄목을 거짓으로 뒤집어 쒸워 광해를 몰아내고 임금이 되니 이가 곧 인조(仁祖)이며 이후 인조는 청나라와는 손을 끊고 명나라만 섬기다가 결국 청나라와 전쟁이 벌어져  인조 14년에 치욕적인 삼전도 항복을 당한다.

 

그 몇 년 후 1640년. 청나라에서 명나라를 칠 테니 조선에서 군대를 보내라고 명령을 하니 이때 성주 출신 이사룡이 포사(砲士)로 징집되어 참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명나라와 전쟁이 시작되자 이사룡은 공포만 쏘고 있었다 한다.

 

이를 발견한 청나라 군사가 추궁을 하니 나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명나라를 배반 할수 없고 스승의 나라를 공격 할 수 없으니 죽어도 명나라 군사를 보고 포를 쏠 수 없다고 당당하게 얘기했다고 한다.

 

결국 그는 처형 되었으며 명나라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전쟁터에 의사 이사룡(義士 李士龍)이란 깃발을 내걸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청나라 황제에게까지 보고되자 황제가 가상한 사람이란 말을 했다한다. 그리고 그 후 인조가 항복할 때 볼모로 잡혀갔던 봉림대군과 소현세자 중 소현세자가 먼저 돌아오면서 이사룡의 유골도 같이 가지고 돌아왔다.

 

이때 시문용과 같이 있던 서학이 멀리까지 나가 명나라와 선생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사룡의 시신을 맞으며 통곡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사룡은 나중에 증 성주목사(贈星州牧使)로 추증 되었으며 그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경북 성주군 용암면 고향 마을에 옥천서원(玉川書院)을 세워 매년 제향하고 있다.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대봉리 776 (용암면 대봉5길 33)

창건연도: 1793년(정조 17) , 사액연도: 1796년(정조 20)

 

이사룡(李士龍, 1595~1641)은 본관이 성산(星山), 자는 사중(士中)으로 조선 중기의 무인이다.

 

서원은 숙종 18년(1692) 성주목사와 관내의 사민(士民)들에 의해 그가 살았던 곳인 월항면 인촌리 작촌에 충렬사(忠烈祠)로 처음 건립된 것에서 연유하며, 정조 20년(1796)에 사액되었다. 그 후 충렬사는 옥천충렬사(玉川忠烈祠) 또는 옥천서원(玉川書院)으로 불려지다가 고종 8년(1872) 서원훼철령에 의해 철폐되었으며, 1919년 직계후손들의 집성촌이 있는 현 위치에 중건되었다.

 

이사룡과 시문용과의 만남에 대해서 보면 1980년대에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 나온 명나라 유민들의 총 모임에서 발간한 대명유민사(大明遺民史)의 책자235페이지에 소개된 이사룡은 시문용에게서 공부를 배웠다고 하며 전쟁터에서의 기록도 위와 유사하게 소개 해 놓았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시문용이 고향으로 돌아 오던 해에  40년 연하인 10세의 이사룡은 청나라 전쟁에 참전할 무렵인 이십 육 칠세까지 고향에 머물면서 대명동과는 거리도 멀지 않았으니 당시  많은 후학을 가르치던 시문용과 제자로서 만남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죽음으로써 명에 대한 의리, 스승에 대한 의리를 지킨 이사룡. 

이 같은 역사적 인연 탓으로 성주 일원의 성산이씨와 절강시씨들은 한 집안처럼 두터운 우의를 유지하고 있다. 

성산 이씨는 2000년 현재 1,770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