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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천상병

류지미 2023. 10. 16. 05:02

197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문학가

천상병

(1930~1993)

천진 무구함과 무욕의 시인

 

『새』

 

한 도시학자에 따르면, 서울 인사동 큰길의 총 길이는 2킬로미터를 조금 넘는다고 한다. 그러나 큰길의 뒤쪽으로 구비구비 이어지며 뻗어나간 골목길의 총 길이는 놀랍게도 큰길의 열 곱절이 넘는다. 그 인사동의 큰길과 구비구비 이어지는 골목길의 켜켜에는 골동품이며 옛 서화와 서책을 파는 오래된 상점과 유명 · 무명 화가들의 그림들이 상설 전시되는 화랑, 많은 찻집과 음식점 등이 빼꼭하게 들어 차 있다. 인사동 큰길에서 어느 골목 어귀로 들어서면 ‘귀천’이라는 간판이 달려 있는 작은 찻집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귀천」은 천상병(千祥炳, 1930~1993)의 널리 알려진 시편이고, 찻집 ‘귀천’의 주인은 그의 아내 목순옥이다. 그 찻집 벽면에는 파안 대소하는 천상병 시인의 커다란 얼굴 사진이 붙어 있다. 천진 무구함과 무욕으로 무장한 천상병은 생전에 자본주의적 관행과 생리에 대해 무차별적인 테러를 감행한 시인이다.

천진 무구함과 무욕의 시인 천상병

 

그는 시쓰기 외에 다른 일은 하지 않고 놀면서 동료 문인들과 시인 지망생들에게 술값 2천 원을 아무 거리낌없이 뜯어낸다. 그래도 천상병을 미워한 사람은 없으며, 시인 자신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를 미워하기는커녕 희귀한 문화재처럼 아끼고 사랑한다. “유별난 꿈과 정열의 소유자이고, 세속적인 관행을 무시하며, 사회적 권위와도 무관하며, 사회의 풍습이나 통념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자기의 길을 걸어간 사람”을 기인이라고 정의한다면, 천상병, 그는 기인임에 틀림없다.

천상병은 1930년 일본 효고의 히메지에서 태어나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살다가 해방을 맞아 귀국한다. 일본에서 입국해 마산중학교 3학년에 편입한 그는 매우 조숙한 천재의 면모를 보인다. 그의 조숙한 재능은 당시 마산중학교 교사이던 김춘수의 눈에 띈다. 1949년 그는 김춘수의 추천으로 시 「강물」 등을 『문예』에 발표한다. 곧 6·25가 터지고 전란 초기에 미군 통역관으로 6개월 동안 근무한 그는 1951년 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한다. 이 무렵 그는 송영택 · 김재섭 등과 동인지 『처녀지』를 발간하고, 『문예』에 「나는 거부하고 저항할 것이다」라는 제목의 평론을 내놓으며 시쓰기와 함께 비평 활동도 겸한다. 천상병은 1952년 『문예』에 시 「갈매기」로 완료 추천을 받으며 정식으로 문단에 나온다.

1960년 한 잡지사에서 추사 글씨를 가운데 두고

왼쪽부터 신동문 · 박재삼, 한 사람 건너 천상병, 맨 오른쪽이 박봉우

 

1954년 그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그만두고 문학에 전념한다. 그는 이 때 『현대문학』에 월평을 쓰는가 하면 외국 서적의 번역에 나서기도 한다. 그러다가 1964년부터 2년 동안 부산 시장의 공보 비서로 일하는데, 이것이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 생활인 셈이다. 1967년에 어이없게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 정도 옥고를 치른 그는 죽을 때까지 다른 직업 없이 오직 시인으로 살아간다.

천상병 결혼 사진

엉뚱하게 ‘동백림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큰 곤욕을 치른 뒤 꽤 오랫동안 행방 불명이 되기도 한 천상병은 결혼을 하면서 새 출발하는 계기를 맞는다.

 

고문 후유증과 심한 음주벽, 영양 실조로 심신이 황폐해진 천상병은 1971년 어느 날 갑자기 거리에서 쓰러진다. 행려 병자로 오인된 그는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된다. 그는 이 때 행방 불명인 채로 지인들과 오랫동안 소식이 끊긴다. 그러자 가까이 지내던 문우들은 천상병이 어디 가서 죽은 것으로 생각한 나머지 서로 뜻을 모아 그의 첫 시집이자 ‘유고’ 시집인 『새』를 간행한다.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 내 영혼의 빈터에 /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 내가 죽는 날 / 그 다음날. // 산다는 것과 / 아름다운 것과 /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 한창인 때에 /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 한 마리 새. // 살아서 / 좋은 일도 있었다고 / 나쁜 일도 있었다고 /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천상병, 「새」, 『새』(조광출판사, 1971)
어디 가서 죽은 줄 알고 가까운 문우들이 뜻을 모아 펴낸 천상병의 첫 시집이자 ‘유고’ 시집인 〈새〉의 안겉장과 겉장

 

새는 그의 시 세계의 중심 심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시적 자아의 대리자 또는 자유 지향성의 상징이다. 새는 삶과 죽음, 천상과 지상의 교차점을 향해 날아간다. 삶은 견디기 힘들 만큼 고통스럽다. 그러자 시인은 죽은 다음날 새가 되어 돌아와 죽음과도 같은 고통 속에 있는 자신의 현존을 응시한다. 시인의 영혼이 새가 되어 다시 삶을 바라보자 그것은 홀연히 찬란한 것으로 비친다. 그렇게 시인은 삶의 절망과 고통을 한 순간에 찬란한 것으로 바꿔놓는다.

 

시인은 한 마리 새가 되어 죽음 쪽에서 삶을 바라보고 삶과 죽음을 동시에 노래하며 현실을 초월하는 방법을 터득한다. 그러나 시인은 이미 초연한 태도로 삶의 모든 것을 바라본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귀천(歸天)」, 『새』(조광출판사, 1971)

「새」와 마찬가지로 「귀천」에서도 시인은 고통스러운 현존의 삶을 죽음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바라보고 있다. 누구보다도 비참하고 불행한 삶을 이어가며, 누구보다도 고통스러운 삶을 견딘 시인은 놀라운 관용과 초연함으로 삶을 끌어안는다. 그러자 비참과 불행으로 얼룩진 삶은 “아름다운 소풍”이 되어버린다. 이 시 어디에도 삶의 고단함이나 죽음의 쓸쓸함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런 것을 맑고 담백한 어조로 가볍게 건너뛰는 것이다.

시인 구상(가운데), 화가 중광(오른쪽)과 함께

 

천상병이 시의 소재로 가장 많이 삼은 게 가난이다. 일정한 직업 없이 떠돌던 그에게 가난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고,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여졌을지 모른다. 오죽하면 “가난은 내 직업”이라고까지 노래했을까.

아버지 어머니는 / 고향 산소에 있고 // 외톨배기 나는 / 서울에 있고 // 형과 누이들은 / 부산에 있는데, // 여비가 없으니 / 가지 못한다. // 저승 가는 데도 / 여비가 든다면 // 나는 영영 / 가지도 못하나? // 생각느니, 아, /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천상병, 「소릉조(小陵調)」, 『새』(조광출판사, 1971)

여비가 없어 고향에 가지 못할 정도의 가난이라면 몹시 심한 가난일 것이다. 이 정도라면 궁핍이 시인의 몸과 마음을 틀림없이 옥죄었으련만 「소릉조」의 어디에도 그 흔적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저 가볍게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저승에도 영영 못 가는 게 아닌가.” 하고 한갓진 걱정을 늘어놓고 있을 뿐이다. 이미 시인은 가난에 익숙해져서 그것에 따로 불만을 갖거나 원한을 품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길들이고, 가난이 주는 조촐한 지복을 즐긴다. 그래서 가난의 고통과 힘을 동시에 체득한 시인은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하고 삶의 신비에 대해 경이감을 나타낸다.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는 것은, /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 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 / 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는 것은 / 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이 없어도 /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 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 / 이 햇빛에도 예금 통장은 없을 테니까.······ / 나의 과거와 미래 / 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 / 내 무덤가 무성한 풀잎으로 때론 와서 / 괴로왔음 그런 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 씽씽 바람 불어라.
천상병, 「나의 가난은」, 『새』(조광출판사, 1971)

가난은 비참이나 불행, 원한이나 분노의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자족하는 마음을 갖게 하고, 조촐한 행복의 조건들을 욕심 없이 투명한 눈으로 바라보게 하는 원천이 된다. 이런 마음을 지니고 살면 욕심에 눈이 어두워 작은 것의 귀함과 삶의 거대함, 그리고 무상으로 주어지는 행복의 조건들을 놓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물질적 궁핍의 상태인 가난은 시인의 내면에 넉넉한 낙관주의를 만들어내는 정신적인 덕성의 요소가 된다.

 

병원에서 요양하며 어느 정도 몸과 마음을 추스른 시인은 1972년에 친구의 손아래 누이인 목순옥과 결혼해 가정을 꾸민다. 1979년 천상병은 첫 시집 『새』에 실린 작품들을 거의 다 옮겨 실은 시집 『주막에서』를 ‘민음사’에서 펴낸다. 이어 1984년에는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 1987년에는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을 내놓는다.

첫 시집 〈새〉에 수록된 작품들을 거의 다 옮겨 실은 시집 〈주막에서〉

 

천상병은 한때 초기의 서정적 스타일에서 벗어나 리얼리즘 스타일의 시를 내놓기도 한다. 금욕주의적인 초연함과 넉넉한 관용으로 세상을 끌어안던 그는 몇몇 시에서 오랫동안 감춰온 날카로운 현실 비판 감각을 드러낸다.

나의 다소 명석한 지성과 깨끗한 영혼이 / 흙 속에 묻혀 살과 같이 / 문드러지고 진물이 나 삭여진다고? // 야스퍼스는 / 과학에게 그 자체의 의미를 물어도 / 절대로 대답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 억지밖에 없는 엽전 세상에서 / 용케도 이때껏 살았나 싶다. / 별다른 불만은 없지만, // 똥걸레 같은 지성은 썩어버려도 / 이런 시를 쓰게 하는 내 영혼은 / 어떻게 좀 안 될지 모르겠다. // 내가 죽은 여러 해 뒤에는 / 꾹 쥔 십 원을 슬쩍 주고는 / 서울길 밤버스를 내 영혼은 타고 있지 않을까?
천상병, 「한 가지 소원」, 『새』(조광출판사, 1971)

시인은 밤 버스를 타고 있는 서민으로서 감당해야 하는 현실을 투명하게 응시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여기서 그는 불합리하고 모순투성이인 현실을 “억지밖에 없는 엽전 세상”으로 마음껏 비하하고, 그 속에서 “용케도 이때껏 살았나 싶다.”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도 한다. 이런 것은 앞서 펼쳐 보인 시 세계에서는 나타나지 않던 자세다. 무엇 때문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현실 세계에 대한 강한 불만과 대립 의식이 사그러들지 않고 거의 날것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의 현실 비판 의식은 더 강화되지 않고, 다시 도가적인 자연의 삶, 가난한 일상 속에서 접하는 자연에 관심을 보이며 높은 경지의 소박성을 추구하는 시 세계로 돌아간다. “비시적인 것과 시적인 것, 일상적 관찰과 철학적 의미, 초연한 관조와 정치적 관심, 소박한 표면과 깊은 내면을 결합하는 독특하고 뛰어난 시”들을 빚어낸 천상병은 후기로 접어들며 이전보다 한결 단순하고 소박하며 고졸한 세계를 보여준다.1) 무엇보다 그의 시는 순수한 것의 원형인 어린아이의 심성을 지향하고, 순진성의 시학을 구현한다. 어린 것, 순진한 것, 약하고 착한 것을 내포한 동심에 대한 사랑과 선(善) 지향은 천상병 시 세계의 움직일 수 없는 특징이다.

천상병의 육필

 

말기에 이르면 천상병은 천진 난만할 정도로 단순한 어조로 기독교의 신인 하느님을 예찬하는 시를 쓰기도 한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깊이 스며든 그의 유고 시들은 우주를 지배하는 하느님과 그 섭리에 감사하는 내용으로 짜여 있다. 시에서 하느님은 대우주에 비견되는데, 그는 절대자를 향한 무궁한 외경심과 찬양 속에서도 어린아이처럼 “하느님은 어찌 생겼을까?” 하는 순진한 호기심을 드러낸다.

1988년 만성 간 경화증으로 춘천의료원에 입원한 시인은 의사로부터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받으나 기적처럼 살아난다. 이후 그는 시집 『요놈! 요놈! 요 이쁜 놈!』(1991),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1993)를 펴낸다. 1993년 4월 28일, 병든 몸으로 누워 있던 시인은 마침내 숨을 거둔다. 천상병이 고단한 이 세상의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가던 날, 의정부시립병원 영안실 밖으로는 추적추적 봄비가 내린다. 같은 해 유고 시집 『나 하늘로 돌아가네』가 나오고, 1996년에는 『천상병 전집』이 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