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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병(千祥炳) 귀천(歸天)

류지미 2023. 10. 16. 05:16

197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문학가

천상병 千祥炳

심온, 深溫

(1930~1993)

천진 무구함과 무욕의 시인

 

『새』

 

 인사동 큰길에서 어느 골목 어귀로 들어서면 ‘귀천’이라는 간판이 달려 있는 작은 찻집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귀천」은 천상병(千祥炳, 1930~1993)의 널리 알려진 시편이고, 찻집 ‘귀천’의 주인은 그의 아내 목순옥이다. 그 찻집 벽면에는 파안 대소하는 천상병 시인의 커다란 얼굴 사진이 붙어 있다. 천진 무구함과 무욕으로 무장한 천상병은 생전에 자본주의적 관행과 생리에 대해 무차별적인 테러를 감행한 시인이다.

천진 무구함과 무욕의 시인 천상병

 

그는 시쓰기 외에 다른 일은 하지 않고 놀면서 동료 문인들과 시인 지망생들에게 술값 2천 원을 아무 거리낌없이 뜯어낸다. 그래도 천상병을 미워한 사람은 없으며, 시인 자신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를 미워하기는커녕 희귀한 문화재처럼 아끼고 사랑한다. “유별난 꿈과 정열의 소유자이고, 세속적인 관행을 무시하며, 사회적 권위와도 무관하며, 사회의 풍습이나 통념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자기의 길을 걸어간 사람”을 기인이라고 정의한다면, 천상병, 그는 기인임에 틀림없다.

 

천상병은 1930년 일본 효고의 히메지에서 태어나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살다가 해방을 맞아 귀국한다. 일본에서 입국해 마산중학교 3학년에 편입한 그는 매우 조숙한 천재의 면모를 보인다. 그의 조숙한 재능은 당시 마산중학교 교사이던 김춘수의 눈에 띈다. 1949년 그는 김춘수의 추천으로 시 「강물」 등을 『문예』에 발표한다. 곧 6·25가 터지고 전란 초기에 미군 통역관으로 6개월 동안 근무한 그는 1951년 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한다. 이 무렵 그는 송영택 · 김재섭 등과 동인지 『처녀지』를 발간하고, 『문예』에 「나는 거부하고 저항할 것이다」라는 제목의 평론을 내놓으며 시쓰기와 함께 비평 활동도 겸한다. 천상병은 1952년 『문예』에 시 「갈매기」로 완료 추천을 받으며 정식으로 문단에 나온다.

1960년 한 잡지사에서 추사 글씨를 가운데 두고

왼쪽부터 신동문 · 박재삼, 한 사람 건너 천상병, 맨 오른쪽이 박봉우

 

1954년 그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그만두고 문학에 전념한다. 그는 이 때 『현대문학』에 월평을 쓰는가 하면 외국 서적의 번역에 나서기도 한다. 그러다가 1964년부터 2년 동안 부산 시장의 공보 비서로 일하는데, 이것이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 생활인 셈이다. 1967년에 어이없게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 정도 옥고를 치른 그는 죽을 때까지 다른 직업 없이 오직 시인으로 살아간다.

천상병 결혼 사진

엉뚱하게 ‘동백림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큰 곤욕을 치른 뒤 꽤 오랫동안 행방 불명이 되기도 한 천상병은 결혼을 하면서 새 출발하는 계기를 맞는다.

고문 후유증과 심한 음주벽, 영양 실조로 심신이 황폐해진 천상병은 1971년 어느 날 갑자기 거리에서 쓰러진다. 행려 병자로 오인된 그는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된다. 그는 이 때 행방 불명인 채로 지인들과 오랫동안 소식이 끊긴다. 그러자 가까이 지내던 문우들은 천상병이 어디 가서 죽은 것으로 생각한 나머지 서로 뜻을 모아 그의 첫 시집이자 ‘유고’ 시집인 『새』를 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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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 내 영혼의 빈터에 /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 내가 죽는 날 / 그 다음날. //

산다는 것과 / 아름다운 것과 /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 한창인 때에 /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 한 마리 새. //

살아서 / 좋은 일도 있었다고 / 나쁜 일도 있었다고 /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천상병, 「새」, 『새』(조광출판사, 1971)

 

어디 가서 죽은 줄 알고 가까운 문우들이 뜻을 모아 펴낸 천상병의 첫 시집이자 ‘유고’ 시집인 〈새〉의 안겉장과 겉장

 

천상병(千祥炳)

 

歸天 /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문단의 마지막 순수시인', '문단의 마지막 기인'으로 불리며 〈귀천〉과 같이 죽음과 피안, 인생의 비통한 현실 등을 간결하게 압축한 시를 썼다. 일본에서 태어났으나 해방되던 해 가족을 따라 귀국하여 마산중학을 나왔고, 1954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수료했다.

 

마산중학 국어교사였던 시인 김춘수의 영향으로 시를 쓰기 시작해 1949년 5학년 때는 〈죽순 竹筍〉지에 시 〈공상 空想〉 외 1편을 발표하였고, 1952년 〈문예〉에 〈강물〉·〈갈매기〉등을 추천받았다. 1953년에는 〈문예〉에 평론 〈나는 거부하고 저항할 것이다〉와 〈사실의 한계-허윤석 론〉을, 1955년 〈현대문학〉에 〈한국의 현역대가(現役大家)〉를 발표하는 등 시와 평론을 겸하는 문학활동을 했다.

 

1956년 〈현대문학〉 월평(月評)을 집필하고 외국 서적을 다수 번역하기도 했다. 이 시기 그의 시에는 인간의 본질적인 외로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모습이 담겨 있고, 평론에는 그의 박식함과 명석함, 비판의식이 나타났다.

 

1967년 소위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간 심한 고문과 옥고로 몸과 마음이 깊이 상해 가난과 방탕, 주벽으로 일관한 삶을 살았고 많은 일화를 남겼다. 1971년 그의 첫 시집 〈새〉는, 행려병자로 오인된 그가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되었을 때, 친구들이 그가 죽은 줄 알고 유고시집으로 엮은 것이다.

 

이후 그의 시는 동심에 가까운 순진성과 티 없이 맑고 깨끗한 서정으로 가난·죽음·고독 등을 일상적이고 소박하며 순수한 말로 표현했으며, 간경변증으로 죽음을 앞둔 시기에 고통과 상처로 얼룩진 지난 세월을 담담하게 돌아보고 인생을 받아들이는 달관과 관조의 태도를 형상화하고 있다.

 

시집 〈주막에서〉(1979),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1984),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1987), 〈귀천〉(1989),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1991), 〈요놈! 요놈! 요 이쁜 놈!〉(1991),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1993)이 있고, 산문집 〈괜찮다 다 괜찮다〉가 있다.

 

유고집으로 시집 〈나 하늘로 돌아가네〉(1993)와 수필집 〈한낮의 별빛을 너는 보느냐〉(1994), 평론집 〈천상병 평론〉(2007)이 있으며, 그의 작품을 모두 정리한 〈천상병 전집〉(2007)이 간행되었다. 2003년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시와 인생을 기리는 기념사업이 꾸준히 추진되어, 그의 일대기를 다룬 연극 〈소풍〉과 뮤지컬 〈귀천〉이 만들어져 공연되고 있으며 2004년부터는 그의 기일에 맞춰 해마다 〈천상병 예술제〉가 열리고 '천상병 시문학상'이 수여된다. 2009년 4월 서울 노원구 상계동 수락산 입구에 '시인 천상병 공원'이 생겼으며 2009년 4월 마산 만날공원에 그의 시 〈새〉가 새겨진 시비가 건립되었다. 2010년에는 의정부에 '천상병 시인 문학관'이 건립될 예정이다.

마산 만날공원에 세워진 천상병 시인 `새
 
 

경남의 거장을 만나다]②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순수 시인 천상병 / KBS 2022.03.16.

https://www.youtube.com/watch?v=DDliQu-JJFI

6,044 views Mar 16, 2022

 

[앵커] '경남의 거장을 만나다' 연중 보도, 두 번째 순서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라는 시 구절로 유명한 천상병 시인은 한평생 자신의 시처럼 순수하고 소박한 삶을 살았는데요. 시인은 떠났지만, 그가 소년 시절을 보낸 창원과 전국 곳곳에 남은 발자취를 차주하 기자가 돌아봤습니다.

[리포트] [천상병, '귀천' 중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서울 인사동의 소박한 찻집 한편. 고(故) 천상병 시인의 대표작, '귀천'이 벽면 가득 새겨져 있습니다. 자신의 시처럼, 고난 속에서도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한평생 소박하게 살았던 천상병 시인. 부인이 생전 생업으로 꾸렸던 작은 찻집에는 천상병 시인은 물론, 많은 문인의 추억이 곳곳에 서려 그리움으로 남았습니다.

 

[김미루/찻집 '귀천' 방문객 : "(천상병 시인은) 아이 같았죠. 늘 동심을 가지고 있었죠. (이 찻집은) 시를 짓는, 꿈꾸는 사람들도 많이 오셨고 참 행복한 시간이었죠. 지금은 많이 허전하고 썰렁하네요."]

 

일본과 창원 진북, 진동을 오가며 어린 시절을 보낸 천상병 시인. 마산중학교에 다니던 무렵, 담임인 '김춘수' 시인이 재능을 알아봐 문예지에 시를 발표했고, 서울대에 진학해 정식 등단했습니다. 시인으로서 자유롭게 활동하기 위해 대학을 중퇴하고, 가난 속에도 작품 활동에 매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고문받아 평생 후유증에 시달렸고, 행려병자로 정신병원에 수용돼 한때 사망했다고 알려질 정도로 고난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시련 속에서도 인간과 예술에 대한 순수성을 잃지 않고 간결하고 쉬운 표현으로 시를 발표해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조재영/마산문학관 학예사 : "(천상병 시인은) 문학과 삶을 떼어놓고 얘기할 수 없는 그런 분입니다. 시에서 드러나는 동심의 세계, 천진성 이런 것들이 (특징입니다.)"]

 

하지만 천상병 시인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가 살았던 창원시와 서울시 노원구, 의정부시 등 어디에도 시인을 기리는 별도의 문학관이 없는 겁니다. 이 탓에 유품도 뿔뿔이 흩어졌다가 최근 한 저작권 회사가 경기도 파주에 카페 겸 전시 공간을 마련한 게 사실상 유일합니다. 유족으로부터 유품 만여 점을 건네 받아 주기적으로 전시 주제를 바꾸지만 전시 공간이 작고 민간의 노력으로만 운영해야 해 고민도 큽니다.

 

[이상만/경기도 파주 '카페 귀천' 대표 : "(과거에는) 유품 보관 장소 자체가 굉장히 열악한 상황이었고요. 천상병 작가님의 문학관을 조심스럽게 만들 수 있기 위한 노력을 최대한 해보겠다…."]

 

고향인 창원의 사정은 더욱 열악합니다. 마산문학관 한편에 시인의 작품과 약력이 간단히 소개됐거나, 공원에 시비가 세워진 게 전부입니다.

 

시인이 자란 창원 진북면 대티리도 마찬가지!

생가 터는 허물다 만 담벼락만 남아 폐허가 됐고, 마을 어디에도 시인의 흔적은 찾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