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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문주란[文珠蘭] 시대의 서막 ‘동숙의 노래’

류지미 2023. 10. 20. 18:28

가수  문주란 [文珠蘭]

중학생 가수 '문주란'의 탄생

 

문주란~동숙의 노래

1966

한산도 작사 백영호 작곡

문주란은 1966년 18세에 '동숙의 노래' 로 데뷔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YZ4BNs8Wp8

 

 

가수 문필연의 데뷔는 그가  13세이던  1964년에 오메가 레코드사에서 녹음 1965년에  발표한  유금춘 작곡집에 수록된 작품 <크리스틴 킬러>, <내 사랑아 안녕>, <남자란 모두 그런가> 등 3곡 입니다.

 

동숙의 노래는 문주란이 14세에 불렀는데 너무 어려서 16세로 발표했다는....


가수 문주란은 1949년 9월 30일생이며 고향은 부산 서면입니다. 문주란 [文珠蘭] 의 본명은 문필연 [文必蓮]입니다. 아버지는 운수업에 종사하고 있었고 5녀 1남 중에 다섯째 입니다. 문주란은 다섯살에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는 세 번 결혼해 계모의 손 아래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문주란의 학력은 성지초등학교, 동래여자중학교, 성만여자상업고등학교 졸업입니다. 중학교 때는 장기자랑 할 때마다 진행을 맡았었다고 합니다. 13살에는 부산 MBC 가요경연대회에 친구들이 몰래 신청해 깐조네 '라노비아'를 불렀습니다. 

 

 

작사가 전우가 문주란에게 찾아와 다짜고짜 무대에 올려 문주란은 '보슬비 오는 거리'를 불렀다고 합니다. 문주란이 노래를 부르자 객석 반응이 뜨거웠고, 작사가 전우는 문필연을 제주도에서 자생하는 천연기념물 '문주란'이라는 예명을 붙이자고 했습니다.

 

문주란은 1966년 18살의 나이로 '동숙의 노래'라는 곡으로 데뷔했습니다. '국내 최저음' 가수라는 수식어를 달고 화제를 모았습니다. 

 


문주란은 1969년 세상을 떠나려고 했었는데, 유부남과 스캔들이 났었기 때문입니다. 1970년에 다시 복귀했지만 1972년 서울시민회관에서 화재가 발생하며 부상을 당했습니다. 1973년 스캔들이 났던 유부남의 부인에 의해 문주란과 7살이었던 어린 조카를 납치해 마구 때렸었다고 합니다. 

 

1975년에도 같은 남성과 사생활 문제가 이어졌고, 방송 정지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연애 실패 이후로 결혼 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문주란은 1990년에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해'를 내며 다시 부활에 성공했습니다. 

 

'돌지 않는 풍차', '보슬비 오는 거리', '공항의 이별', '파스' 등의 곡을 냈습니다. 

 

 

문주란의 목소리는 아주 낮은 저음으로 유명한데, 국내 여자 가수중에서 가장 많이 내려가고 0옥타브대의 저음을 소화한다고 합니다. 

 

 

문주란은 서초동 280평 주택에 살다가 경기도 청평에 430평 카페를 겸한 주택에서 전원생활을 했습니다. 아파트로 이사갔는데 답답하지만 청소하기가 편해서 좋다고 합니다. 

 

 

 

문주란 - 공항의 이별

1972

작사가 : 정두수 작곡가 : 박춘석

https://www.youtube.com/watch?v=bcwij6JEJOk

 

 

문주란 동숙의 노래 

 

너무나도 그님을 사랑 했기에

그리움이 변해서 사모친 미움

원한맺힌 마음에 잘못 생각에

돌이킬수 없는 죄 저질러 놓고

뇌우치면서 울어도 때는 늦으리

음 음 음 음 때는 늦으리

 

님을 따라 가고픈 마음이건만

그대 따라 못가는 서러운 이몸

저주받은 운명에 끝나는 순간

님의 품에 안기운 짧은 행복에

참을 수 없이 흐르는 뜨거운 눈물

음 음 음 음 뜨거운 눈물 

 

 

https://youtu.be/gDeBtwDUc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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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 사정 볼 것 없다"
"덕수궁 돌담길"
가수 진송남씨의 회고담이다.


1959년 한국 첫 민간 상업방송으로 개국한 부산 문화방송 MBC는 개국 초창기부터 신인가수 선발에 적극적이었다.
‘만인의 라디오’ ‘자유로운 라디오’를 표방했던 부산MBC는 개국 초기부터 전속가수 제도를 실시하였다.


1962년, 진송남씨는 부산MBC 전속가수 모집에 응시, 드디어 3기생으로 발탁된다.
62년부터 64년까지 3년 간 전속가수로 활동했다.




특히 부산MBC의 간판 프로그램이자 아마추어 가수 등용문이었던 '톱싱거(어)대회'는
지금까지도 부산MBC의 저력을 보여준 공개방송으로 평가되는데 '가요 콩쿨(화)', ’가요대전(목)',
‘아마추어 스테이지/노래 흉내 콩쿨(금)'로 각각 요일마다 다르게 편성, 10년 이상 장수했던 프로그램이다.


진송남씨가 특히 기억하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 '톱싱거대회' 신청자 중 교복을 입은 앳띤 소녀가 왔어요.
너무 어려 ‘학생은 곤란하니 나중에 졸업하고 오라’고 돌려보냈죠. 어차피 어려서 방송은 불가할 거라고 생각했죠.


그렇게 예심을 마치고 본선에 진출할 인원이 선정됐는데,
이때 한 청년이 다가와 방금 그 여학생의 오빠라며 노래를 한번만 들어봐달라고 사정을 해요. 해서 마지못해 노래를 시켰지요”


노래가 시작되는 순간, 피아노 반주를 하던 진송남씨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저히 10대 소녀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저음의 허스키보이스가 자그마한 몸집에서 울려나왔어요.
모두들 깜짝 놀랐죠. 그래서 부랴부랴 이미 선정된 다른 사람을 다음 주에 꼭 출연시켜주겠다고 약속하고
그 자리에 대신 이 여학생을 끼워 넣었죠.”


결국 이 10대 소녀는 주말 장원을 거쳐, 월말대회, 연말 최종결선까지 올라
‘보고 싶은 얼굴(현미 노래)’을 부르며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이 소녀가 바로 동래 여자중학교 3학년생 文必蓮,
즉 우리나라 여가수 중 가장 낮은 최저음을 구사한다는 文珠蘭이다.
특히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듯한 저음으로, 구사하는 음색이 아주 매력적이었다고 진송남씨는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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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년 10월 20일(금)
  • 아시아 투데이

[대중가요의 아리랑]  문주란 [文珠蘭]  시대의 서막 ‘동숙의 노래’

기사승인 2023. 09. 17. 17:30
 
 
 
'너무나도 그 님을 사랑했기에/ 그리움이 변해서 사무친 미움/ 원한 맺힌 마음에 잘못 생각에/ 돌이킬 수 없는 죄 저질러 놓고/ 뉘우치면서 울어도 때는 늦으리/ 음~ 때는 늦으리// 님을 따라 가고픈 마음이건만/ 그대 따라 못 가는 서러운 이몸/ 저주받은 운명에 끝나는 순간/ 님의 품에 안기운 짧은 행복에/ 참을 수 없이 흐르는 뜨거운 눈물/ 음~ 뜨거운 눈물'


'동숙의 노래'는 경제성장을 위해 너나없이 허리를 졸라매었던 1960년대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대다수 국민들이 가난했던 그 시절이었다. 남자들은 중동 건설현장이나 월남전에 나가 외화를 벌어들였고, 여자들은 독일 간호사로 파견되어 온갖 궂은일을 다하거나 전국의 공단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특히 초등학교조차 겨우 졸업한 여공들의 고단한 일상은 눈물겨운 것이었다.

우리가 오늘 이렇게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고 한류의 위상을 자랑할 수 있는 것도 지난날 '동숙'과 같은 숱한 우리의 딸과 누이들이 못 배운 서러움과 사회적인 냉대 속에서 숙명처럼 흘린 피와 땀 덕분일 것이다. 이른바 '공순이'라는 이름으로 희뿌연 공장의 불빛을 지켜온 대가로 가족을 부양하고 동생들 학비를 보태던 그녀들의 헌신을 잊어서는 안 된다. '동숙의 노래'는 그런 시대의 아픔을 웅변한다.
 


이 노래는 어느 비극적인 사연이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가난한 농부의 딸인 동숙은 서울의 가발공장에 다니며 시골 부모의 생활비와 동생 학비를 보내고 있었다. 국어 선생님이 되는 게 꿈이었던 동숙은 더 늦기 전에 공부를 하려고 검정고시학원에 등록하면서 그 학원 강사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순진한 그녀는 장래를 약속한다는 남자에게 모든 것을 다 내어주면서도 행복했다.

강사의 어머니가 쓰러졌다는 말에 그동안 모아뒀던 돈을 병원비로 다 내어놓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자신이 다니던 공장마저 문을 닫는 처지가 되었는데, 사랑했던 남자 또한 알고 보니 약혼녀가 있었다. 배신감을 이기지 못한 동숙은 그 학원 강사를 칼로 찌르게 되고 결국 살인미수죄로 철창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는 얘기다. 이것이 '동숙의 노래' 가사가 만들어진 배경이라는 것이다.

당시 비슷한 치정사건이 신문 지면에 등장한 것은 사실이다. '동숙의 노래'의 탄생 비화 또한 여러 차례 방송을 타기도 했다. 그러나 진실 여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훗날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한 문주란마저 관련 증언을 번복했고, 정작 작사가 한산도의 정확한 의견 표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노랫말과 얽힌 안타까운 사연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서 문주란에 대한 관심도 폭증했다는 것이다.

작사와 작곡 그리고 노래가 삼위일체의 압권을 이루며 '동숙의 노래'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타인들' '내 몫까지 살아주' '돌지 않는 풍자' '공항의 이별' '그 사람' 등으로 이어지는 문주란 시대를 여는 서곡이었던 것이다. 문주란은 당시 국내 최저음 여가수였다. 아담한 체구와 인형 같은 외모에서 흘러나오는 매혹적인 중저음 허스키 보이스에 놀란 작곡가 백영호가 그녀를 전격 스카우트할 정도였다.
 
 


이미자의 후속 주자로 문주란을 지목한 백영호가 특유의 음색을 살린 데뷔곡을 작곡한 것이 바로 '동숙의 노래'였다. 10대의 어린 나이에 파격적인 데뷔를 한 문주란은 숱한 화제를 모으며 일약 스타가 되었지만 삶은 평탄하지 못했다. 노래 속의 '동숙'이 빙의라도 된 듯 적잖은 사건과 사고에 휘말리며 독신생활을 이어왔다. 하지만 문주란 노래의 특별한 감성은 지금껏 대중의 가슴에 긴 여운을 드리우고 있다.



/조향래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