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부석사[ 榮州浮石寺]
은행나무 한 그루, 단풍나무 한 그루.. 단풍이 들면 너무 아름다운 거리....
부석사는 우리나라 화엄종의 본찰로 초조인 의상 이래 그 전법 제자들에 의해 지켜져 온 중요한 사찰이다. 번잡한 세상과 불법의 세계를 나누는 상징적인 문이기 때문에 ‘일주(一柱)’ 문이지만 기둥 수는 대개 2개. 옆에서 볼 때 기둥이 한 줄로 보인다고 해서 ‘일주(一柱)’문이다.
부석사 중창 기적비
부석사 당간 지주
부석사 천왕문
부석사 금강문
신라의 불교는 눌지왕 때에 들어와 법흥왕 때에 수용된 뒤에 크게 발전하였다. 중국을 통하여 전입된 교학 불교는 신라 불교로 하여금 종파성을 띄게 하였는데 가장 특징적으로 운위되는 종파는 화엄종과 법상종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전법사실이 뚜렷하고 종찰이 확실한 것은 의상의 화엄종이다.
부석사는 우리나라 화엄종의 본찰로 초조인 의상 이래 그 전법 제자들에 의해 지켜져 온 중요한 사찰이다. 의상은 676년 부석사에 자리잡은 뒤 입적할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았고 그의 법을 이은 법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석사 원융국사비에는 지엄으로 부터 법을 전해 받은 의상이 다시 제자들에게 전법하여 원융국사에까지 이른 것과 원융국사가 법손이 된 뒤 부석사에 자리잡았다는 사실 등이 밝혀져 있다.
승당지로 추정되는 곳으로 큰 석조와 맷돌이 남아있어 부석사의 사격(寺格)을 전하고 있다. 경내에는 괘불대 ‚ 석등의 화사석 ‚ 불상광배편 ‚ 배례석 ‚ 장대석 등 석물의 부재들이 산재해 있다.
부석사 3층 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130호)
양쪽 2기의 탑이 있었다...
삼층석탑 옆의 종무소와 요사
삼층석탑 뒤쪽 전경
부석사에는 2개의누각이 있다. 앞의 범종루각과 뒤쪽 무량수전 앞의 안양루...
범종루각
부석사가 소백산맥을 향하여 날아갈 듯이 앉아 있는데 범종각이 정면을 향하고 있으면 건물이 전반적으로 무거워 보인다. 따라서 범종각을 옆으로 앉혀놓고 뒷쪽을 맞배로 처리하여 건물이 전반적으로 비상하는 느낌을 주고 답답해 보이지 않아 좋다.
범종각
위쪽 석축단의 좌우에 있는 건물들로 1980년의 보수 정화공사 이후에 신축한 것이다. 범종각은 정면 3칸 ‚ 측면 2칸 규모의 익공계 맞배집으로 기둥만 세워 개방하였는데 기둥 사이는 홍살로 막았다. 막돌로 만든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모서리는 원형 주좌를 가진 방형 초석을 사용하여 특이하다.
범종루각 남쪽으로 새로운 또 다른 범종각과 요사
범종루각 북쪽으로 요사
봉황산 부석사 편액을 달고 있는 법종각루는 무 단청의 황토빛 나무들과 담백한 편액 글씨가 잘 어우러진다.
범종루각 오르며 바라본 안양루와 무량수전
부석사에는 안양루와 범종루각이다. 문의 성격을 겸한 안양루가 석축 위에 작고 날아갈 듯하게 지은 누각이라면 대석축단과 안양루 석축으로 구분되는 공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범종루각은 지반에 견고하게 버티고 선 안정감 있는 건물이다. 특히 이 범종각은 그 건물의 방향이 여느 건물과는 달리 측면으로 앉아있다. 건물의 지붕은 한쪽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고 다른 한쪽은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데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 치기 쉽다. 팔작지붕을 한 쪽이 정면을 향하고 있고 맞배지붕이 뒤쪽을 향하고 있는데 무량수전 앞에서 바라보면 왜 목수가 지붕을 그리했는지를 알 수 있으며 그 지혜에 절로 감탄이 난다.
범종루각 앞에서 바라본 안양루와 무량수전....
부석사는 시원스럽게 내달려 온 태백의 연봉들이 끝나는 봉황산 중턱에 자리한다.
부석사 안양루는 무량수전 앞마당 끝에 놓인 누각이다. 정면 3칸 ‚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무량수전과 함께 이 영역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건물에는 위쪽과 아래쪽에 달린 편액이 서로 다르다. 난간 아랫부분에 걸린 편액은 ‘ 안양문 ’ 이라 되어 있다...
무량수전 바로 아래 안양루에 걸린 이 편액은 명필로 이름난 이승만 대통령이 쓴 친필의 작품이다. 오른쪽 부(浮) 자의 삼 수(水) 변이 목탁을 두드리며 예불을 드리는 스님의 모습이라고 해서 유심히 보게 된다.
들어가는 곳이 좀 특이하다. 입구가 누각 아래의 문을 지나야 다음을 지날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안양루는 무량수전 앞마당 끝에 놓인 누각이다. '안양'은 극락이므로 안양문은 극락 세계에 이르는 입구를 상징한다.
따라서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지나면 바로 극락인 무량수전에 이르는 구조다.
안양루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엎드려 모여 있는 경내 여러 건물들의 지붕과 멀리 펼쳐진 소백의 연봉들이 한눈 에 들어온다. 아스라이 보이는 소백산맥의 산과 들이 마치 정원이라도 되듯 외부 공간은 확장되어 다가온다. 부석사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경관이다.
그래서 예부터 많은 문인들이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소백의 장관을 시문으로 남겼고 그 현판들이 누각 내부에 걸려 있다.
누각 아래를 통해 올라와 보면 안양루 뒤편에 누각 이름 편액이 걸려 있다. 안양루(安養樓)현판은 영주 출신의 명필 소남(小南) 김종호(1901~85) 글씨라 한다.
위층 마당 쪽에는 ‘ 안양루 ’ 라고 씌어 있다. 하나의 건물에 누각과 문이라는 2중의 기능을 부여한 것이다. ‘ 안양 ’ 은 극락이므로 안양문은 극락 세계에 이르는 입구를 상징한다.따라서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지나면 바로 극락인 무량수전이 위치한 구조다.
무량수전 앞에서 바라본 멋진 전경
안양루 앞에 서서 내가 올라 왔던 속계, 색계, 무색계의 길을 다시 한번 더듬어 보니 ...
조금 가파른 안양루 아래 계단을 올라서면 국보 석등과 무량수전이 보인다.
부석사 현판아래 안양문을 통해 오르면 석등이 있는 무량수전 앞 마당과 안양루를 만난다.
부석사 무량수전 앞 마당의 석등( 국보17호)
4개의 창을 두었고, 나머지 4면에는 세련된 모습의 보살상을 새겨놓았다.
석등 하대석엔 모서리를 향해 한 잎씩 연꽃 잎이 조각돼 있고 그 끝을 말아 귀꽃으로 표현 했다.
부석사의 백미 무량수전 (국보 제18호)은 고려중기의 무량수전의 공포와 현존 최고의 사찰 편액이 650여년 전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 현판, 고려시대 명필로 유명한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영주 부석으로 왔을 때 직접 어필한 현판이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탄성이 절로 나오는 정말 아름다운 광경이였다. 안양각, 범종각의 팔작지붕은 마치 하늘을 날아오를 듯 하였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안개낀 산능성은 마치 나를 다른 세계에 있는 듯 하였다.
난 한참을 그 기둥에 기대서서 그렇게 아름다운 한 장면을 내 가슴에 담았다. 그 장면은 오랫동안 나의 기억에 남을 듯하다.
무량수전의 맞배기 처마
무량수전 처마는 안허리곡(曲) 기법을 썼다. 건물 중앙보다 귀부분 처마 끝이 더 튀어나오도록 처리해 팔작 지붕이 더욱 날아갈 듯 보이게 했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들창 걸이
무량수전의 화장기 없는 맑은 얼굴이 무명옷 입은 여인네 모습에 느꼈던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무량수전 (국보 제18호)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건물 가운데 하나이다. 역사적으로 인정되기로는 안동 봉정사 극락전이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알려져 있지만 건물 규모나 구조 방식 ‚ 법식의 완성도라는 측면에서는 무량수전에 비하여 다소 떨어진다. 그러므로 무량수전은 고대 불전 형식과 구조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기준이 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 ‘원융국사비문’에 의하면 고려 현종 7년(1016) 원융국사가 무량수전을 중창하였다고 한다. 1916년 실시된 해체 공사 때 발견된 서북쪽 귀공포의 묵서에는 공민왕 7년(1358) 왜구에 의하여 건물이 불타서 우왕 2년 (1376)에 원융 국사가 중수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건축 양식이 고려 후기 건물과 많은 차이를 보이므로 원래 건물은 이보다 약 100년 정도 앞선 13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광해군 3년(1611)에 서까래를 깔 고 단청을 하였고 1969년에는 번와 보수하였다.
무량수전은 정면 5칸 ‚ 측면 3칸 규모인데 평면의 경우 건물 내부의 고주 사이에 형성된 내진 사방에 한 칸의 외진을 두른 형식을 취했다. 기둥 사이의 주칸 거리가 크고 기둥 높이도 높아 건물이 당당하고 안정감 있게 지어졌다. 지붕은 팔작 형식인데 지붕의 물매는 후대 건물에 비하여 완만하다. 예로부터 건물의 구조는 단면에 위치한 도리의 수를 셈하여 말하는데 이 집은 소위 9량집으로 외목을 제외한 도리가 9개나 되는 큰 건물이다.
무량수전의 주존으로 봉안된 소조아미타여래 좌상(국보 제45호)
무량수전은 주불전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신 전각이다. 아미타여래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녔으므로 무량수불로도 불리는데 '무량수'라는 말은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
무량수불로도 불리는 아미타여래를 모셨다고 해서 무량수전이다...
법당 안 아미타불의 웅혼함과 파격의 벽면, 법당 정면 중앙이 아니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보고 앉은 국보 제45호 아미타 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
부석사 무량수전의 불상은 왜 법당 정면이 아니라 왼쪽 벽에 앉아 있을까? 무량수전이 서방 극락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의 법당이기 때문에 불상이 동쪽을 보도록 배치됐다.
무량수전의 신중탱
빛바래 형태를 알수없는 내부벽화를 보니 마음이 짠하다...
내부 법당의 북쪽 방향
법당 내부 배흘림기둥
오체투지 삼배에 마음 담아 올리고 돌아 나와 신라 화엄종의 본산 부석사의 창건 설화가 깃들어 있는 뜬 바위인 부석을 본다.
신라 화엄종의 본산 부석사의 창건 설화가 깃들어 있는 뜬 바위- 부석. 이 부석을 따라 부석사로 이름지었다.
주지스님 거처와 석불
삼성각
칠성 ‚ 독성 ‚ 산신 세 분을 한 곳에 모신 전각으로 무량수전 서쪽 석축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삼성각은 우리나라 재래 의 수(壽) ‚ 복(福) ‚ 재(財)의 삼신 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삼성각 내부의 산신. 칠성. 독성탱
다시 무량수전을 거쳐 조사당방향으로 향해본다...
고려시대의 부석사 삼층석탑(보물 제 249호)
무량수전 동쪽(무량수전을 바라보고 오른쪽 뒷편)에 비탈에 있는 선묘각이 있는데 전각이 아주 소박하다...
선묘각은 의상 조사의 창건 설화와 관련된 인물인 선묘를 모신 건물이다. 규모도 작고 기단도 없이 초라하여 마치 작은 사찰의 산신각 같은 느낌을 준다.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 규모의 맞배집인데 가구 방식이나 부재를 다듬은 수법으로 보아 최근세의 건물인 듯하다. 내부에는 선묘 의 영정이 걸려있다.
"선묘낭자는 의상대사가 중국(당나라)에 유학당시에 잠시 머물렀던 집의 여식이라고 한다.
선묘낭자는 의상에게 반해 사랑을 고백하였지만 학승인 의상대사가 받아줄리 만무 하였을터...
가슴속에 사랑을 품고만 지내던차에 10여년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잠시 선묘의 집에 인사차 의상대사가 들렀단 소릴 듣고 집으로 돌아 가지만 의상대사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의상대사에게 줄 법복 등을 들고 부둣가로 달려가 보지만 이미 배는 떠나가고 있었다.
선묘는 마음속으로 제발 이 법복만이라도 의상에게 갈수 있도록 해달라고 빌면서 보따리를 힘껏 던졌다.
보따리는 멀리 날아 뱃전의 의상 앞에 떨어지고....
사랑을 이룰수 없었던 선묘는 죽어서라도 의상의 귀국길을 지키겟노라 서원을 하며 바다에 몸을 던졌다.
선묘는 죽어서 용이되어 의상의 귀국길이 평탄하도록 도왔으며, 후일 부석사를 창건할때도 용으로 현신하여 의상을 도왔다." 는 설화가 있다...
선묘각 내부 벽화
무량수전에서 조사당으로 오르는 길에 내려다본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조사당으로 오르는 길은 이런 고즈녁한 산길이다...
조사당 (국보 제19호)
조사당은 의상대사의 초상을 모시고 있는 곳으로 고려 우왕 3년(1377)에 세웠고, 조선 성종 21년(1490)과 성종 24년(1493)에 다시 고쳤다.
앞면 3칸· 옆면 1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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