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암초등학교 선운 분교를 개보수하여 2001년 11월 3일 개관한 미당 시문학관
시인의 고향마을이며 마을 뒷산 소요산이 솟아 있고 좌우로 생각와 묘소가 있다.
서정주
徐廷柱 | Seo Jeong-j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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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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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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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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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씨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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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쓰시로 시즈오(達城 静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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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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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未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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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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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방옥숙, 슬하 2남 5녀
여동생, 남동생 서정태 |
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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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자화상」
눈물 아롱 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 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 삼만 리.
「귀촉도」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솥작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국화 옆에서」
내 마음속 우리 님의 고은 눈섭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동천」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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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시인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호는 미당(未堂)이다. 화사집을 냈을 무렵에는 궁발(窮髮)이라는 호도 사용했다. 탁월한 언어 감각과 전통 소재의 활발한 활용으로 대한민국 문학계(특히 현대시)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목으로 평가받지만 친일, 친독재 행위와 반인륜 범죄에 대한 미화 때문에 기회주의적 어용 문인 의 행태를 보였다 평가도 받는다. 친일 전력이 있는 문학가의 글은 교과서나 참고서에 되도록 싣지 않으나, 그의 글은 정말 잘 썼고 중요성이 높다 보니 여전히 때때로 실리며 모의고사에도 출제된다. 나치에 협력한 전적이 있지만 철학계에서 높은 위상을 차지하는 하이데거와 비슷한 입장.
2. 생애
1915년 5월 18일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서당에서 공부를 하다가 1924년 인근의 줄포로 이사하여 줄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1929년 졸업했다. 서정주의 아버지는 김성수 집안의 마름이었기 때문에 같은 동네에 살았다. 서정주의 시 「자화상」의 "애비는 종이었다." 부분은 이 점을 의식하고 쓴 것으로 보인다. 다만 지주의 아랫사람이긴하나 액면 그대로 서정주의 아버지가 종 취급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름이라는 직종은 중간 관리자로 마을에서 소작농들에게 직접적으로 소작료를 거둬들이는 위치다. 그래서 악질 소리 듣는 지주들도 최소한 소작농들보다는 잘 대해주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김성수는 소작인들에게도 함부로 대하지 않아 동네에서 인심을 얻었기에 마름인 서정주의 아버지도 막 대하진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14세에 상경해서 중앙보통학교에 입학했으니 아주 가난한 집안도 아니었을 것이다.
복원한 생가와 미당시문학관은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 있다. 동백꽃으로 유명한 선운사에 들렀다가 뒤로 돌아서 가보면 (차로 10분 거리) 딱 좋은 곳. 아무래도 선운사를 찾는 김에 찾는 사람들이 있는 듯.
한때는 이곳에서 시 낭송 대회도 했으며 현재는 하지 않는 듯하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와는 달리 친일 행적에 대해서도 숨기지 않고 드러내놓고 있어 그의 발자취를 제대로 느끼기에는 좋은 곳. 그곳에서 다시 더 가보면 인촌 김성수의 생가가 나온다.
1929년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같은 해 11월 일어난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여했다가 경찰서로 연행된 뒤 풀려난 적이 있다. 이듬해에는 사회주의 이념에 감화돼 빈민 운동에 투신, 당시 아현동에서 살고 있던 좋은 하숙집에서 나와 빈민굴에서 생활하다 장티푸스에 걸렸었다.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하지만 같은 해인 1930년 광주학생항일운동 1주년 기념 학생운동을 주모한 혐의로 구속되어 퇴학당한다.
1931년 고향 쪽의 고창고등보통학교에 2학년으로 편입했으나 일본 교육과 시험을 거부하는 백지 동맹 사건을 주동해 그해 가을 권고 자퇴를 당하게 된다. 당시 서정주는 만주나 러시아로 갈 계획을 세우고 아버지의 돈 300원을 훔쳐 고향을 떠났지만 결국 서울에 눌러앉는 것으로 그쳤는데, 이때 많은 책을 접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이후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면서, 서정주 자신이 스승으로 모셨던 승려 석전 박한영을 비롯해 작가 김동리, 함형수, 이상 등과 만나 교류했고 특히 오장환과는 각별한 우정을 쌓았다. 1935년에는 현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에 당시 교장을 지냈던 박한영의 권유로 입학했으나 1년 뒤 자퇴했다.
1933년 「그 어머니의 부탁」이라는 시를 시작으로 여러 작품을 기고 형식으로 발표하다가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면서 등단하게 된다. 이 등단 과정이 좀 특이한데, 서정주의 회고에 따르면 「벽」 역시 여느 작품처럼 신문에 투고한 것인데 담당자의 실수였는지 신춘문예 원고로 바뀌어서 당선까지 된 것이라고 한다. 같은 해인 1936년 김동리, 김달진, 오장환, 함형수 등과 함께 「시인부락」을 창간했고, 1938년 방옥숙과 결혼해 두 아들을 낳았다. 1941년에는 「자화상」, 「화사」, 「문둥이」 등의 시가 수록된 첫 시집 「화사집」을 출간해 문단의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당시 서정주는 오장환, 이용악과 함께 한국 시단의 3천재로 불리우며 사람들의 기대를 받았다. 하지만 이후 1940년대에 친일적 활동을 하는 오점을 남겼다.
해방 이후 1946년 김동리, 조지훈, 곽종원, 박목월, 조연현 등과 함께 좌파문인단체 조선문학가동맹에 대응키 위해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창설해 시 분과위원장을 맡았고, 현실 참여 문학 대신 순수시를 택했다. 이후 동아일보 문화부장, 초대 문교부 예술과장을 거쳐 1949년 초대 한국문학가협회 시 분과위원장을 맡았다. 1950년 6.25 전쟁 당시 문총구국대 활동을 하며 전쟁 초기 한강을 간신히 건넜으나,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 탓에 조현증이 발병해 요양하여 그 영향 탓인지 시 세계가 확장되었다. 1954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추대되었다. 1948년 「화사집」의 세계와는 사뭇 다른 「견우의 노래」, 「귀촉도」, 「푸르른 날」 등이 수록된 2번째 시집 「귀촉도」를 출간했고, 이어 1956년 「무등을 보며」, 「국화 옆에서」, 「추천사」 등이 수록된 3번째 시집 「서정주시선」을 출간해 해방 이전에 이어 시인으로서 또다시 크게 주목받았다.
1961년에는 「꽃밭의 독백」, 「고조」, 「무제」 등이 수록된 4번째 시집 「신라초」를, 1968년에는 「동천」,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선운사 동구」 등이 수록된 5번째 시집 「동천」을 출간하면서 명실공히 한국의 대표 시인 중 한 사람으로 높이 평가받게 된다. 한국의 문화와 정서를 독특한 언어 구사력으로 표현한 서정주의 시는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며, 이전까지 단명한 시인이 많았던 한국 시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뛰어난 작품을 많이 발표했기 때문에 한국문학사에서 가장 큰 시인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또한 박재삼 등 여러 뛰어난 시인을 발굴하고 오랫동안 교수직에 있으면서 많은 시인 지망생들을 가르치는 등 시인 양성에 노력을 쏟기도 했다. 시 이외의 다른 문학 분야에서도 많은 글을 남겨 자서전인 「도깨비 난 마을 이야기」와 「천지유정」을 비롯한 여러 권의 산문집과 평론집을 내기도 했다. 특히 평론 중에서 「한국의 현대시」에 수록된 김소월의 시를 다룬 글은 지금 읽어도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진보 문학계 시각으로 보면 그의 순수시는 '우파적인 경향을 띤 문학'이라고 비판받는다.
1975년에는 「신부」, 「상가수의 소리」,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 등이 수록된 여섯 번째 시집 「질마재 신화」를, 1976년에는 「시론」, 「낮잠」 등이 수록된 일곱 번째 시집 「떠돌이의 시」를 출간했다. 이후의 시들은 서정주의 후기 시에 속하는데,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완성도가 떨어져 별로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는 편이다. 1977년에는 신문사의 후의로 세계여행을 다녀와 1980년 기행시집 「서으로 가는 달처럼...」을 냈고, 1982년에는 한국의 역사를 시로 표현한 시집인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를 냈다. 같은 시기 한국문인협회 이사장(1977~1979)도 맡았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 정권을 잡은 전두환을 찬양하는 내용의 글을 쓰는 등 친독재적인 행보를 저질러 많은 이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83년 자신의 생애에서 인상 깊었던 사건들을 소재로 한 시집 「안 잊히는 일들」을, 1984년 노래로 쓰이도록 만든 시들을 묶은 시집 「노래」를 출간했고, 1988년 자서전적 성격의 담시들을 쓴 시집 「팔할이 바람」을 냈다.
또한 김성수는 소작인들에게도 함부로 대하지 않아 동네에서 인심을 얻었기에 마름인 서정주의 아버지도 막 대하진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14세에 상경해서 중앙보통학교에 입학했으니 아주 가난한 집안도 아니었을 것이다.
복원한 생가와 미당시문학관은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 있다. 동백꽃으로 유명한 선운사에 들렀다가 뒤로 돌아서 가보면 (차로 10분 거리) 딱 좋은 곳. 아무래도 선운사를 찾는 김에 찾는 사람들이 있는 듯.
한때는 이곳에서 시 낭송 대회도 했으며 현재는 하지 않는 듯하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와는 달리 친일 행적에 대해서도 숨기지 않고 드러내놓고 있어 그의 발자취를 제대로 느끼기에는 좋은 곳. 그곳에서 다시 더 가보면 인촌 김성수의 생가가 나온다.
1929년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같은 해 11월 일어난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여했다가 경찰서로 연행된 뒤 풀려난 적이 있다. 이듬해에는 사회주의 이념에 감화돼 빈민 운동에 투신, 당시 아현동에서 살고 있던 좋은 하숙집에서 나와 빈민굴에서 생활하다 장티푸스에 걸렸었다.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하지만 같은 해인 1930년 광주학생항일운동 1주년 기념 학생운동을 주모한 혐의로 구속되어 퇴학당한다.
1931년 고향 쪽의 고창고등보통학교에 2학년으로 편입했으나 일본 교육과 시험을 거부하는 백지 동맹 사건을 주동해 그해 가을 권고 자퇴를 당하게 된다. 당시 서정주는 만주나 러시아로 갈 계획을 세우고 아버지의 돈 300원을 훔쳐 고향을 떠났지만 결국 서울에 눌러앉는 것으로 그쳤는데, 이때 많은 책을 접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이후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면서, 서정주 자신이 스승으로 모셨던 승려 석전 박한영을 비롯해 작가 김동리, 함형수, 이상 등과 만나 교류했고 특히 오장환과는 각별한 우정을 쌓았다. 1935년에는 현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에 당시 교장을 지냈던 박한영의 권유로 입학했으나 1년 뒤 자퇴했다.
1933년 「그 어머니의 부탁」이라는 시를 시작으로 여러 작품을 기고 형식으로 발표하다가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면서 등단하게 된다. 이 등단 과정이 좀 특이한데, 서정주의 회고에 따르면 「벽」 역시 여느 작품처럼 신문에 투고한 것인데 담당자의 실수였는지 신춘문예 원고로 바뀌어서 당선까지 된 것이라고 한다. 같은 해인 1936년 김동리, 김달진, 오장환, 함형수 등과 함께 「시인부락」을 창간했고, 1938년 방옥숙과 결혼해 두 아들을 낳았다. 1941년에는 「자화상」, 「화사」, 「문둥이」 등의 시가 수록된 첫 시집 「화사집」을 출간해 문단의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당시 서정주는 오장환, 이용악과 함께 한국 시단의 3천재로 불리우며 사람들의 기대를 받았다. 하지만 이후 1940년대에 친일적 활동을 하는 오점을 남겼다.
해방 이후 1946년 김동리, 조지훈, 곽종원, 박목월, 조연현 등과 함께 좌파문인단체 조선문학가동맹에 대응키 위해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창설해 시 분과위원장을 맡았고, 현실 참여 문학 대신 순수시를 택했다. 이후 동아일보 문화부장, 초대 문교부 예술과장을 거쳐 1949년 초대 한국문학가협회 시 분과위원장을 맡았다. 1950년 6.25 전쟁 당시 문총구국대 활동을 하며 전쟁 초기 한강을 간신히 건넜으나,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 탓에 조현증이 발병해 요양하여 그 영향 탓인지 시 세계가 확장되었다. 1954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추대되었다. 1948년 「화사집」의 세계와는 사뭇 다른 「견우의 노래」, 「귀촉도」, 「푸르른 날」 등이 수록된 2번째 시집 「귀촉도」를 출간했고, 이어 1956년 「무등을 보며」, 「국화 옆에서」, 「추천사」 등이 수록된 3번째 시집 「서정주시선」을 출간해 해방 이전에 이어 시인으로서 또다시 크게 주목받았다.
1961년에는 「꽃밭의 독백」, 「고조」, 「무제」 등이 수록된 4번째 시집 「신라초」를, 1968년에는 「동천」,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선운사 동구」 등이 수록된 5번째 시집 「동천」을 출간하면서 명실공히 한국의 대표 시인 중 한 사람으로 높이 평가받게 된다. 한국의 문화와 정서를 독특한 언어 구사력으로 표현한 서정주의 시는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며, 이전까지 단명한 시인이 많았던 한국 시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뛰어난 작품을 많이 발표했기 때문에 한국문학사에서 가장 큰 시인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또한 박재삼 등 여러 뛰어난 시인을 발굴하고 오랫동안 교수직에 있으면서 많은 시인 지망생들을 가르치는 등 시인 양성에 노력을 쏟기도 했다. 시 이외의 다른 문학 분야에서도 많은 글을 남겨 자서전인 「도깨비 난 마을 이야기」와 「천지유정」을 비롯한 여러 권의 산문집과 평론집을 내기도 했다. 특히 평론 중에서 「한국의 현대시」에 수록된 김소월의 시를 다룬 글은 지금 읽어도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진보 문학계 시각으로 보면 그의 순수시는 '우파적인 경향을 띤 문학'이라고 비판받는다.
1975년에는 「신부」, 「상가수의 소리」,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 등이 수록된 여섯 번째 시집 「질마재 신화」를, 1976년에는 「시론」, 「낮잠」 등이 수록된 일곱 번째 시집 「떠돌이의 시」를 출간했다. 이후의 시들은 서정주의 후기 시에 속하는데,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완성도가 떨어져 별로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는 편이다. 1977년에는 신문사의 후의로 세계여행을 다녀와 1980년 기행시집 「서으로 가는 달처럼...」을 냈고, 1982년에는 한국의 역사를 시로 표현한 시집인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를 냈다. 같은 시기 한국문인협회 이사장(1977~1979)도 맡았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 정권을 잡은 전두환을 찬양하는 내용의 글을 쓰는 등 친독재적인 행보를 저질러 많은 이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83년 자신의 생애에서 인상 깊었던 사건들을 소재로 한 시집 「안 잊히는 일들」을, 1984년 노래로 쓰이도록 만든 시들을 묶은 시집 「노래」를 출간했고, 1988년 자서전적 성격의 담시들을 쓴 시집 「팔할이 바람」을 냈다.
1985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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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기에 이르러서는 기억력 감퇴를 막기 위해 매일 1600여 개의 세계의 산 이름을 외웠는데 이를 바탕으로 1991년 시집 「산시」를 냈다. 말년까지 공부와 시쓰기를 활발하게 하여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러시아 유학을 떠나기도 했고 1990년대 중반 「세계 민화집」과 동화집 「우리나라 신선선녀 이야기」를 쓰기도 했다. 1993년 시집 「늙은 떠돌이의 시」, 1997년 마지막 시집 「80소년 떠돌이의 시」를 출간했다.
말년에는 친일행위와 여러 정치적인 행보로 인해 살해협박과 스토킹에 시달려야만 했다. 특히 그의 아내와 그에 대한 모욕적인 헌사도 서슴치않는 연락이 매 시간 단위로 걸려왔다고 한다. 실제로 집 앞에 외부인이 칼을 들고 한 참 동안 머물다가 간 적도 있다고 한다. 결국 이러한 협박과 스토킹에 회의를 느꼈는지 미국으로 피난하다시피 떠났고, 아내와 함께 장기간 머물게 채류하게 된다.이 후 90년 중반에서야 귀국할 수 있었다.
말년인 1997년의 서정주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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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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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문학 작품을 쓸 때 현재도 따라갈 이가 없는 수준의 단어 구사와 소재 선택 능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논란이 되는 시기 이외의 작품에서는 순수 문학적 색채를 지향했으며 소재로 전통적 요소들을 많이 차용한 것으로도 높이 평가받는다. 특히 그의 첫 시집인 「화사집」에 수록된 시들은 몸부림치는 생명력을 시적인 표현으로 적절하게 소화해내었다는 평을 듣는다. 이문열의 봉인됐다가 풀린 소설 「사로잡힌 악령」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느 정도 가감만 하면 서정주의 시라는 게 확연히 드러나는 능력이 있다. 위에서 인용된 시들 외에 당장 널리 애송되는 유명한 구절들만 언급하더라도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다.
사향 박하의 뒤안길이다. / 아름다운 배암... / 을마나 크다란 슬픔으로 태여났기에, 저리도 징그라운 몸둥아리냐 (「화사」)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 /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 (「견우의 노래」)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푸르른 날」)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무등을 보며」)
서으로 가는 달같이는 /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추천사」)
노래가 낫기는 그 중 나아도 / 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오고, / 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 / 바닷가에 가 멎어 버렸다. (「꽃밭의 독백」)
이별이게, / 그러나 / 아주 영 이별은 말고 / 어디 내생에서라도 /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이렇듯 순수하게 문학적 업적만 보면 한국 현대시의 거목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지만, 문학인으로서의 의무를 회피하고 일신의 안위만 노린 기회주의자라는 비판 또한 받는 이중적인 인물이다. 즉, 자기 그릇에 걸맞지 않게 과분한 재능을 가진 인간이라는 평가가 많다. 이 때문인지 그의 사망 이후로 교과서에서 그의 시가 많이 빠졌다고 하며 서울특별시 관악구에 있던 서정주의 집은 폐가로 방치되었다가 2011년 복원되어 개방했다. 아마 친일 행위만 하지 않았더라면 모의고사나 수능에 윤동주나 이육사급 이상으로 많이 출제되었을 것이다. 당장 친일 행위 관련 비판이 많음에도 모의고사에 얼굴을 비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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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단에서 서정주를 진지하게 비판하는 여론은 알게 모르게 묻힌다는 말이 있으나 이는 사실이라고 보기 어렵다. 물론 서정주 본인이 살아 있었을 때야 좋든 싫든 문단에서 그가 한 자리 꿰차고 앉아 있었을 때니 대놓고 비판하기는 좀 어려웠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전에나 사후에나 그의 잘못된 행보를 비판하는 이들은 결코 적지 않았고 심지어 서정주를 옹호하는 이들의 경우에도 그가 잘못된 행적을 남겼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인정하고 있다. 한 쪽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시인일지라도 거의 평생에 걸쳐 잘못을 저지른 인물에게 찬사를 보내서야 되겠느냐'는 주장과 다른 한쪽에서는 '그런 오점 때문에 그의 문학 전체가 매도되거나 평가절하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느냐'는 입장의 차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 한편 대중이나 젊은 학생들이 막연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학계에서 진지하게 평가되는 작가의 문학적 성취와 업적은 차이가 꽤 크다. 서정주와 대비되어 높게 평가받는 윤동주는 대중들에게 다가가기 좋은 면이 많아서 그렇지, 문학적 성취에서는 서정주나 백석보다 분명히 한 수 아래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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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자화상」(1937)에 나오는 '애비는 종이었다'는 구절을 가지고 '종놈의 자식'이라고 까는 경우도 있다. 이 시에서도 나오듯이 서정주 집안은 김성수 집안과 같은 동네에서 살았는데 그렇게 된 것이 서정주의 아버지가 지주 김성수 집안의 마름이었기 때문이다. 마름은 소작농들을 관리하는 중간 관리직으로 소작농들 앞에서는 지주 못지 않은 권세를 누렸다. 「동백꽃」의 점순이도 바로 이 마름 집안 딸이다. 이건 그의 친일 행각과는 무관한 인신공격성 발언이기는 하지만, 그의 경력이 워낙 악질적인지라 '말당'과 함께 서정주를 비판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종놈 새끼라는 식으로 자주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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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문학적인 성취는 높은 사람인지라 생전에 수많은 제자들을 기르긴 했지만, 제자들이라고 해서 모두 그의 친일 행위와 친군부 행위에 우호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되려 더 크게 비판하고 반감을 가지는 이가 많다. 서정주의 제자인 소설가 조정래는 그의 친일 행위와 친군부 행위를 "수십 년 동안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평가했다. 사실 조정래는 서정주 생전 이를 이야기했던 적이 있다. 1985년 당시 조정래는 「한국문학」이라는 문학지를 맡았는데 광복 40주년을 맞아 8월호에 '친일문인'을 다루는 특집 기사를 기획하고 친일 전력이 있는 문인 가운데 생존자들을 찾아 그들의 행적을 스스로 지면을 빌려 이야기하고 사죄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조정래에게 서정주는 은사인 동시에 아내(이자 동창) 김초혜 시인과 하는 결혼식에서 주례를 서 준 사람이었으니 말하기 굉장히 어려운 게 당연하다. 아내와 길게 상담하고 고민한 끝에 서정주를 찾아간 조정래는 서정주에게 "글 마지막에 잘못했다고 한 마디만 하시면 선생님께서는 자유로워지십니다."라고 말하였으며 이 말을 들은 서정주는 조정래에게 "네가 내 제자로서 그럴 수가 있냐"며 크게 화를 냈다 한다. 조정래의 회고에 따르면 그냥 쫓아내지는 않고 조정래 앞에서 자신의 행적에 대해 변명하는 장광설을 두 시간 동안 펼쳤다고 한다. 죽기 얼마 전에 텔레비전에 나와 기자에게 자신의 친일 행적에 대한 질문을 받자 "거 뭐 잘들 봐달라고 해!"라고 말하고 끝내 버렸다. 이를 집에서 화면으로 보던 조정래는 차라리 이 때 한 마디라도 하기를 바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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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 조지훈 역시 그에게 큰 굴욕감을 주었는데 매해 정월 후배 문인들이 항상 사실상 대선배인 서정주를 제쳐두고 제일 먼저 조지훈에게 인사를 드리러 갔다. 이유는 조지훈은 학생들과 함께 선두에 서서 독재 정권을 타도하는 시위대를 학생과 함께 이끈 지조 있는 문인이었기 때문. 역시 동갑내기 문인 황순원도 그에게 크나큰 굴욕감을 주었는데 황순원은 박정희 정권이나 전두환 정권에 어떠한 비판이나 칭송도 거부하고 침묵을 지켰고 이에 문인들은 "역시 선생님다우십니다"라고 극찬하며 인사드리러 갔다. 당연히 후배 문인들이 이러한 행동을 보이자 서정주는 이에 굉장히 열등감을 느꼈다.그러한 까닭에 서정주 본인은 '순원을 보면 옛 고즈넉한 우리 선조들이 떠오른다'며, 황순원 칠갑잔치 때 축시를 쓴 적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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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시인의 수필집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1967년 겨울 서정주의 동서인 김관식 시인이 신경림 시인과 함께 조지훈 시인의 집에 새해 문안 드리고 술자리를 가졌다. 그 다음에 서정주 시인에게 세배 드리러 갔는데 이 때 김관식은 술에 너무 취한 나머지 그만 신발을 벗고 택시를 타 버려서 눈길을 양말 바람으로 걸어와야 했다. 서정주는 그 모습을 보고 "술 좀 작작 마시라"고 훈계하였다. 그러자 김관식은 술김에 화가 난 나머지 "이전의 행적을 볼 때 형님을 먼저 뵙는 것은 뭔가 아닌 것 같아서 조지훈 선생 댁에 먼저 세배 드리고 오는 길입니다."라고 말했으며 이에 서정주는 몹시 화를 내며 노발대발했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그 자리에서 막걸리 주전자가 김관식의 머리로 날아갔다고 한다. 이 때 함께 찾아온 신경림 시인에게도 불벼락이 떨어졌는데 "이런 미친 놈과 어울리면 자네도 미친 놈이 될 테니 함께 다니지 말게!"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에 서정주의 아우인 우하 서정태가 김관식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했다고 전한다. 김관식은 서정주에게 '사위 같은 동서'였다. 서정주의 처제는 언니(서정주의 아내)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 서정주가 처제를 딸처럼 키웠기 때문이라 한다. 김관식은 스무 살에 낸 첫 시집에서 조지훈의 추천사를 받았는데 결혼 전에 낸 2번째 시집에서는 서정주의 추천사를 받았으니 서정주 입장에서는 어찌 보면 서운할 만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정주는 김관식을 매우 아껴서, 그가 몸에 아플 때에는 닭고기와 과일을 마련하고는 몸소 병문안 가서 몸보신을 시켜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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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11일 미당 서정주 시인의 8살 아래 남동생인 우하(又下) 서정태 시인이 97세에 별세했다. 동생으로 서정주와 사이가 각별했고 형을 따라 시인을 꿈꿨으며 서정주는 19살에 당시 15살인 여동생과 11살인 남동생의 시를 묶어 「형제시첩>이라는 제목으로 문집을 냈다. 미당 서정주 동생 서정태 시인, 97세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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