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암초등학교 선운 분교를 개보수하여 2001년 11월 3일 개관한 미당 시문학관
시인의 고향마을이며 마을 뒷산 소요산이 솟아 있고 좌우로 생각와 묘소가 있다.
미당(未堂) 궁발(窮髮) 말당(末堂) 다츠시로 시즈오(達城靜雄)
4.1. 친일 행적
나는 여기 인제 내 생애에서 가장 창피한 이야기들을 한바탕 벌여놓아야 할 마련이 되었다. 그것의 제목은 친일적 업적 또는 전범 여부에 대한 것이다. (…) 정치 세계에 대한 부족한 지식이 내 그릇된 인식을 만들고, 이 그릇된 인식에서 나온 언행들이 내 생애의 가장 창피한 일들을 빚었다. (…) 여기 깊이 사과해 둔다.
서정주, 문학적 자서전 『천지유정』 중에서
서정주는 1942년 7월 13일~17일 자 매일신보에 실린 '시의 이야기'라는 평론, 1943년 9월 1일~10일자에 '인보정신', 1944년 12월 9일 "松井(まつい ) 오장 송가", 1943년 국민문학 10월 호에 일문 '항공일', 1943년 조광 10월호에 '스무살된 벗에게'라는 수필, 11월호에 '최체부의 군속지망'이라는 소설, 12월호에 '보도행'이라는 르포 등 거의 전분야에 걸쳐 친일 행위를 하였다.
이후 말년인 1992년 신동아 4월호에 '일정말기와 나의 친일시'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그 동안 내가 써온 시나 그 밖의 글 중에서 일정 말기에 쓴 몇 개의 글이 '친일파'라는 비난의 대상이 되어 1980년대의 한동안 우리 문단의 일각에서 새삼스럽게 문젯거리가 되더니 요즘에 와서 또 웬일인지 다시 이 나라의 신문들이 이걸 내걸고 공격을 하고 있다"라고 분개하며, 자신이 친일 시를 쓰게 된 배경에 대해 징용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친일 문학을 한 것처럼 호도하였다. 거기다 자신이 쓴 친일시를 정 연구하고 싶으면 도서관에 가 알아서 찾으라고 적고 있다.
그후 다시 일본의 지배가 몇백 년은 더 갈 것 같아 체념하며 친일 시를 썼다며 상황론으로 자신의 친일을 해명한다. 1992년 「시와 시학」 봄호에서 평론가 김재홍씨와 대담을 통해 "쓰라는 대로 쓸 수 밖에 없었고 모든 정보가 차단된 상태에서 해방이 그토록 빨리 오리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해방이 그토록 빨리 올 줄은 몰랐다"는 말은 단순한 변명이 아니라 30년대 이후 숨 쉬는 것 말고는 전부 일제 허락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닥치면서 독립운동을 하건 하지 않건 국내에선 보편적인 인식이었다. 이때 국내 독립운동은 '일제의 허락' 아래 진행되는 실력 양성/교육 사업을 제외하면 고사했고 지배 체제가 더욱 탄탄해지면서, 독립 가능성에 대한 회의적인 인식이 널리 퍼졌다. 독립운동가들도 "이제 독립은 어려우니 일본의 지배는 인정하되 대신 그 테두리 안에서 조선 민족의 권익을 최대한 확보하자"는 노선으로 변화를 주었고 조선인 일본군 중에 비교적 후세대에 속한 이응준이나 채병덕은 이런 인식 아래 언젠가 일본의 협력 아래 조선이 독립하려면 일본 내에서 조선인의 위상을 올려야 한다는 의외로 민족적인 목적으로 일본군에 자원 입대한 사람들이다.
일본의 패망과 조선 독립이 연결된다는 가능성은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야 처음 공식적으로 제시되었지만, 그것도 사업가나 유학생 같이 국제 정세 흐름을 눈치챌 수 있는 사람들 혹은 외부에 끈이 있는 사람들 이야기였다. 문인은 가방끈만 길뿐 세상 돌아가는 사정에는 어두운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김동인 같은 블랙 코메디가 나오기도 했으니까.
松井(まつい) 오장 송가
아아 레이테만은 어데런가
언덕도
산도
뵈이지 않는,
구름만이 둥둥둥 떠서 다니는
멫천 길의 바다런가.
아아 레이테만은
여기서 멫만 리런가…….
귀 기울이면 들려오는
아득한 파도소리…….
우리의 젊은 아우와 아들들이
그 속에서 잠자는 아득한 파도소리…….
x
얼굴에 붉은 홍조를 띄우고
「갔다가 오겠습니다」
웃으며 가드니
새와 같은 비행기가 날아서 가드니,
아우야 너는 다시 돌아오진 않는다
x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오장(伍長).[19]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인씨(印氏)의 둘째 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신풍(神風,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
정국대원(靖國隊員).[20]
정국대원의 푸른 영혼은
살아서 벌써 우리게로 왔느니,
우리 숨 쉬는 이 나라의 하늘 위에
조용히 조용히 돌아왔느니
x
우리의 동포들이 밤과 낮으로
정성껏 만들어 보낸 비행기 한 채에
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
소리 있이 내리는 고흔 꽃처럼
오히려 기쁜 몸짓 하며 내리는 곳,
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
수백 척의 비행기와,
대포와, 폭발탄과,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 같은 병정을 싣고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원수 영미국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려쳐서 깨었는가?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x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
한결 더 짙푸르른 우리의 하늘이여.
x
아아 레이테만은 어데런가
멫천 길의 바다런가.
귀 기울이면
여기서도, 역력히 들려오는
아득한 파도소리…….
레이테만의 파도소리…….
[19] 현대 대한민국 국군으로 치면 하사에 해당하는 계급. 오장은 구 일본군 육군에서만 쓰이던 계급임을 감안하면 밑에 언급될 육항대 소속이라는 점을 뒷받침하고 있다. 구 일본군 해군에서는 삼등병조가 오장과 비슷한 위치였다.
[20] 정국대(靖國隊)는 비행부대명으로, 여기서 "정국(靖國)"은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의 "야스쿠니(靖國)"를 말한다. 기존에는 "귀국대원(歸國隊員)" 또는 "구국대원(救國隊員)"으로 오독되어 왔는데, 2009년에 발간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보고서와 사료집, 그리고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서 처음으로 바로잡혔다.
친일시 중 가장 잘 알려진 「松井(마쓰이) 오장 송가」. 시의 마쓰이 오장, 인재웅(印在雄)은 실존인물로 서정주 외에 노천명도 마쓰이 오장을 기리는 친일시를 내기도 했다.[21] 전쟁이란 딱딱한 소재를 운문으로 세련되게 묘사하는 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닌데 유려하게 시상을 전개해 후반부에 단번에 감정을 폭발시킨다. 문체만 보면 웬만한 서정시 저리가라다. 수미상관의 구조로 자아내는 여운은 덤. 친일시인데도 그 와중에 쓸데없이 고퀄리티다.
시에서 자주 언급되는 레이테 만 해전은 가미카제가 첫 등장한 전투이다. 일본 해군은 이 레이테 만 해전의 사마르 해전에서 미군의 호위 항공모함과 구축함으로만 이뤄진 작은 함대의 용맹한 분투에 쫓겨 도망쳐야 했다. 위의 친일시에서 그렇게 찬양해대던 가미카제로 깨부쉈다는 항공모함도 위에 일본 함대를 내쫓은 호위 항공모함 한 척이었다.
[21] 시의 주인공 인재웅은 이후 생존하여 해방 후 귀국했다고 잘못 알려져 왔는데, 이는 근거 없는 낭설이다. 해방 후에도 인재웅을 본 사람은 전혀 없었다. 1946년 1월 12일 『자유신문』의 기사를 통해 미국포로가 되어 하와이 수용소에 들어갔다 생환한 2,500명이 인천항에 상륙하였으나, 명부를 조사한 결과 인재웅의 생존은 허보임이 판명되었다고 보도되었다. 기사에 따르면 인재웅의 양친은 "찬바람이 살을 여위듯 하는 부두에 온종일 서 있으며 아들을 만나려다 그것이 허사인줄 알게되자 애통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고 한다
4.2. 친독재행위
해방 이후 우파로 스탠스를 확립한 후 좌익 문인단체 '조선문학가동맹'을 비난하는가 하면, 이승만을 기리는 전기를 썼고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베트남 파병을 촉구하는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또한 1981년 대선 당시 전두환 대통령 후보를 위해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그를 지지하는 지원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1987년에는 전두환의 만 56세 생일을 기념하여 찬양시를 지어 바쳤다.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처음으로
- 전두환 대통령 각하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
처음으로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이 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 이여
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새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
잘사는 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물가부터 바로 잡으시어
1986년을 흑자 원년으로 만드셨나니
안으로는 한결 더 국방을 튼튼히 하시고
밖으로는 외교와 교역의 순치를 온 세계에 넓히어
이 나라의 국위를 모든 나라에 드날리셨나니
이 나라 젊은이들의 체력을 길러서는
86 아세안 게임을 열어 일본도 이기게 하고
또 88서울 올림픽을 향해 늘 꾸준히 달리게 하시고
우리 좋은 문화 능력은 옛것이건 새것이건
이 나라와 세계에 떨치게 하시어
이 겨레와 인류의 박수를 받고 있나니
이렇게 두루두루 나타나는 힘이여
이 힘으로 남북 대결에서 우리는 주도권을 가지고
자유 민주 통일의 앞날을 믿게 되었고
1986년 가을 남북을 두루 살리기 위한
평화의 댐 건설을 발의하시어서는
통일을 염원하는 남북 육천만 동포의 지지를 받고 있나니
이 나라가 통일하여 홍기할 발판을 이루시고
쥐임없이 진취하여 세계에 웅비하는
이 민족 기상의 모범이 되신 분이여!
이 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
시간과 공간의 영원한 찬양과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
(1987. 1.)
위의 '松井( まつい ) 오장 송가'를 읽고 이 시 중간의 '86 아세안 게임을 열어 일본을 이기게 하시고' 부분을 읽으면 정말 만감이 교차한다. 문학평론가 이경철은 「미당 서정주 평전」에서 이 시를 일컬어 '서정주 자신도 다시 보고 싶지 않고 누구에게도 보이기 싫어했겠지만, 지금도 인터넷에 전문이 떠돌며 시인의 이름을 먹칠하고 있는 시'라 말하였다.
이러한 친전두환 행위에 대한 반론도 존재하는데, 친일행위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어디까지나 강요된 행위라는 주장. 이들은 위에 서술된 전두환 축하시가 '전혀 진실성이 느껴지지 않고 표현력도 낮다'라며 서정주를 옹호하나, 전두환이 웃는 얼굴을 보고 "세상을 구제하실 미륵의 미소다"라고 한 적도 있다.
서정주가 왜 이런 짓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대체로 서정주 특유의 순응주의적 태도와 정치감각의 결여, 반공주의가 낳은 비뚤어진 정치적 보수주의, 개인적으로 연루된 정치적 사건의 여파로 인해 생긴 정치에 대한 정신적 불안 등이 합쳐져 그런 지나친 권력 옹호로 드러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도 언급된 평론가 이경철은 서정주와 여러 번 인터뷰를 갖기도 했을 만큼 친분이 있었던 인물이다. 그는 서정주가 두고두고 비난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생전에 사죄의 말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해 여러 차례 이 문제에 대해 사죄를 할 것을 추궁했고, 결국 서정주는 중앙일보에 실린 말년의 인터뷰에서 "생각해보니 무척 잘못된 일이었네. 그때 그들에게 짓눌리고 있던 많은 사람들의 안위를 위해 협조했으나 돌이켜보니 내 짧은 생각이었네."라고 말하게 된다.
4.2.1. 옹호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의 시와 친일행위가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 이유로는 "서정주는 시인이었다. 즉, 서정주는 시로써 평가를 받아야 하지 친일행위로써 평가를 받아서는 안된다."라고 한다.
또한 그를 옹호하는 사람 중, 평론가 이남호의 말에 따르면 "미당의 삶에서 시인 고은과 달리 정치적 삶의 비중은 작았다. 미당의 시 너편을 인용하면서 시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고 태생과 분수에 대해 말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비슷한 의견으로, 미당의 시는 예술지상주의, 순수문학에 속하는 것으로 정치참여, 민중문학과는 거리가 멀었다. 따라서, 문학과 정치를 분리하여 작품활동을 했지만, 인정 욕구와 잘못된 정치관으로 인해 기회주의적 행보를 보였다. 이러한 점에서 고은의 오명은 그의 작품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위선적 행위이지만, 서정주의 작품은 스스로 자행한 정치적 헛발질과 분리되어 읽힐 수 있다는 것이다.
서정주의 친일 활동이 현실보다 지나치게 부각되었다는 관점도 있다. 실제로 1943년 그가 본격적으로 친일활동에 들어가기 전에 그는 그의 처녀시집 「화사집」에 「바다」와 같은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띤 시를 남겨왔으며, 오늘날로 따지면 고등학교 시절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여했다가 조사를 받았던 적이 있는 등 애국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조선일보 폐간호에 싣기 위해 썼던 작품 「행진곡」은 민족주의적인 열망을 고취시켰다는 혐의를 받기도 했다. 행진곡이라는 시를 읽은 연극 배우들이 작품에 탄복하여 독립운동과 관련된 연극을 하고 다녔는데 그들이 당시 경찰에 붙잡히고 나서 이러한 사실을 말했기 때문이다. 해당 진술로 인하여 서정주는 감옥에 갇히게 되지만, 당시 경찰 중 하나가 문학에 대한 큰 애정을 가지고 있는 터라 서정주를 미워하지 않았으며 그 덕분에 서정주는 일찍 풀려났다고 한다.
아래는 「행진곡」의 전문.
또한 그를 옹호하는 사람 중, 평론가 이남호의 말에 따르면 "미당의 삶에서 시인 고은과 달리 정치적 삶의 비중은 작았다. 미당의 시 너편을 인용하면서 시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고 태생과 분수에 대해 말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비슷한 의견으로, 미당의 시는 예술지상주의, 순수문학에 속하는 것으로 정치참여, 민중문학과는 거리가 멀었다. 따라서, 문학과 정치를 분리하여 작품활동을 했지만, 인정 욕구와 잘못된 정치관으로 인해 기회주의적 행보를 보였다. 이러한 점에서 고은의 오명은 그의 작품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위선적 행위이지만, 서정주의 작품은 스스로 자행한 정치적 헛발질과 분리되어 읽힐 수 있다는 것이다.
서정주의 친일 활동이 현실보다 지나치게 부각되었다는 관점도 있다. 실제로 1943년 그가 본격적으로 친일활동에 들어가기 전에 그는 그의 처녀시집 「화사집」에 「바다」와 같은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띤 시를 남겨왔으며, 오늘날로 따지면 고등학교 시절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여했다가 조사를 받았던 적이 있는 등 애국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조선일보 폐간호에 싣기 위해 썼던 작품 「행진곡」은 민족주의적인 열망을 고취시켰다는 혐의를 받기도 했다. 행진곡이라는 시를 읽은 연극 배우들이 작품에 탄복하여 독립운동과 관련된 연극을 하고 다녔는데 그들이 당시 경찰에 붙잡히고 나서 이러한 사실을 말했기 때문이다. 해당 진술로 인하여 서정주는 감옥에 갇히게 되지만, 당시 경찰 중 하나가 문학에 대한 큰 애정을 가지고 있는 터라 서정주를 미워하지 않았으며 그 덕분에 서정주는 일찍 풀려났다고 한다.
아래는 「행진곡」의 전문.
잔치는 끝났더라.
마지막 앉아서 국밥들을 마시고
빠알간 불 사르고,
재를 남기고,
포장을 걷으면 저무는 하늘.
일어서서 주인에게 인사를 하자.
결국은 조금씩 취해 가지고
우리 모두 다 돌아가는 사람들.
목아지여
목아지여
목아지여
목아지여
멀리 서 있는 바닷물에선
난타하여 떨어지는 나의 종소리.
서정주에 따르면 위 시는 조선일보의 폐간 기념시이다. 서정주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집에 돌아오니 엽서 한 장과 전보 한 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둘 다 조선일보 학예부장 김기림(金起林)이한테서 온 건데, 엽서의 내용은 조선총독부에서 신문을 폐간하라고 하여 그 기념호를 내게 되었으니 며칠까지 기념시를 한 편 빨리 써 보내라는 것이고, 전보는 그것을 다시 독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헤아려 보니 그 기념호가 나온 날짜는 이미 지났고, 나는 초청받고도 너무 늦게 가서 이미 끝난 잔치 자리에 혼자 불사른 재나 밟고 서 있는 꼴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늦은 대로 나는 그걸 안 쓰고는 있을 수가 없어 ‘행진곡(行進曲)’이란 제목으로 하나 지어 보았다
실제로 다른 친일 문학가들에 비해 오히려 적은 기간동안 친일 활동을 해온데다 친일로 인한 이렇다 할 혜택도 받지 못했던 서정주의 친일이 부각된 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입장이다.
첫째, 그가 「국민문학」에 일본어로 발표했던 「항공일에」가 일본 문학인들의 찬사를 받게 되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여린 숨을 폭폭 내쉬며
내 귓가에서 자그마한 서운녀(西雲女)가
일곱 살 서투른 고향 말씨로
아이 하늘은 서울이레야,
속삭이던 그 하늘이구나
마늘이랑 파랑 고추를 먹고
기름때 절은 하이얀 옷을 입은
뜨겁디뜨거운 가슴을 안은 이들이
산비둘기 울던 노오란 길을
가고 가던 진초록
바로 그 하늘이구나
아아 애달퍼라 아직은 감을 수 없는 눈과 눈이여
잊을 수 없는 파아란 정
해 저물어 밤이 되면
별똥은 반짝거려
아아 애달퍼
지금 사랑하는 사람들
스러져 나날이 하늘은 깊어만 가고
여기 있는 건 내 덧없는 몸짓과 말뿐
메아리와 파도소리와
해맑은 좁은 마당엔
꽃축제 올리는
쇠가죽 북소리만 은은해
아아 날고프구나 날고 싶어
부릉부릉 온몸을 울려
사라진 모든 것
파랗게 걸린 저 하늘을
힘차게 비상함은
내 진작 품어온 바람 !
서정주 「항공일에」 번역
실제로 일본의 노리타케 미츠오는 서정주의 이 작품을 보고 40년대에 발표된 작품 중 최고의 작품이라 칭하며 시인 미당이 일본 문학가들에게는 없는 묘한 유통력이 있다고까지 하였다 한다. 이것을 고려했을 때, 서정주의 친일파로서의 명성은 일본 문학가들의 지지로 인한 것임을 추측해 낼 수 있다.
둘째, 그가 친군부 시인이었다는 점이다. 서정주 시인을 반대하는 인물들 중에서 그의 친군부 행적을 친일 행적과 엮어 그를 비난하는 과정으로 인해 더욱 친일 행적이 부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전만 해도 서정주의 친일행위는 "그럴 수도 있지"하는 분위기였는데 전두환 찬양시 발표 이후에는 그나마 용서받던 친일 행위도 더욱 거세게 비판을 받는 상황에 이르렀다.
특히 그가 했던 말인 '일제 치하가 이백년을 갈 줄 알았다.'라는 말은 그가 자신의 친일 행적을 부끄러운 일이라 언급하며 자신이 당시의 시대상을 잘못 파악했고 어리석었다고 고백하며 했던 말이다.
서정주도 시인이기 전에 인간이므로, 빛과 그림자가 공존한다. 민주주의 사상의 초석을 닦았다는 프랑스인 장 자크 루소는 육아의 교육성을 강조했는데도, 슬하에 둔 다섯 자녀를 모두 고아원에 팔아넘겼다.
마츠이 오장만 해도 뒷날 서정주 배격에 앞장선 고은의 시와 비교하면 재능의 차이가 확연히 느껴지며 왜 이 사람이 대가 소리를 듣는지 알려줌과 동시에 그 좋은 재능으로 이런 행위를 했다는데 분통이 배로 터지게 된다.
즉 이런 식으로 어두운 면만 거론하며 비판하는 것은, 인류사에 길이길이 남은 위인도 전부 쓰레기로 낙인을 찍는 모순을 연출한다. 따라서 서정주를 동정하는 사람들도 일리는 있다. 정리하자면 그 인물의 모순적인 태도는 잠시 접어두고 업적을 인정하는 말이다.
4.2.2. 비판
자신의 의도로 자신의 능력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것은 그 행동의 의미 또한 명확히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 행동으로 이득을 취했느냐 아니냐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 시절엔 일제가 천년만년 갈 것 같았다는 변명도 궁색하기 짝이 없는 게, 조금만 식견이 있던 사람들은 아낙네 요강까지 전쟁 물자로 징벌하던 시점에서, 늦어도 일본 본토에 폭격기 날아다니던 시점에서 이미 일제의 패망을 예측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저게 변명이 된다고 쳐도, 그럼 광복 후의 군사 정권도 천년만년 갈 거라 생각해서 헌시나 쓴 것인가? 서정주란 인간 자체가 그냥 정치나 시대에 대한 안목은 없었으면서 또 권력의 회유에는 적극적으로 가담한 전형적인 기회주의적인 문인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서정주의 변명이 설득력을 얻을려면 말로만 하지 않고 행적으로 보였어야 했는데 차남 서윤이 가출을 하면서까지 말렸으나 신군부에게도 똑같은 행태를 보였으니 후세의 입장에서는 전형적인 면피성 발언으로밖에 평가할 수 없다.
게다가 서정주는 권력을 매우 밝혔기 때문에, 자기 행적을 자꾸만 합리화하려 들었다. 신군부를 옹호하며 권력 지향적인 행태를 보이고 심지어는 자신의 친일 행위에 대해 언급조차 불쾌해했다는 점은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서정주는 뻔뻔스럽게 자신이 배신했던 한국인의 정서와 문화를 소재로 유명해졌기 때문에, 그의 문학은 기만이라고 비난받는다. 실제로 언론 등에서 자신을 포장하려고 소탈한 문학인(혹은 노인) 이미지를 자주 차용했다.
서정주는 평생 기회주의자였다. 미당의 문장은 한국어의 미학의 극치를 보여주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으로서 서정주는 평소에는 국가나 사회와 같은 거대 담론을 미학적 관점에서나 주절거리고 있다가, 그런 거대한 권력 구조가 조금만 자기 본인의 인생에 영향력을 발휘하면 아예 생리적으로 거기에 꼬리 말고 굴종하기 바빴던 유약하고 비굴한 기회주의자의 전형이었다.
무엇보다 서정주가 다른 친일 예술가와 급이 다른 인간으로 취급받는 이유가 오랫동안 대한민국에서 주요 문인으로 주목받은 점도 있지만 서정주의 행보가 단순 친일을 넘어 카미카제를 옹호하는 반인륜 범죄에 대한 옹호와 미화를 저질렀다는데 있다. 일제강점기 수많은 친일 예술가들이 나타났지만 서정주처럼 카미카제라는 반인륜적 전범행위를 옹호하고 홍보한 인간은 극히 드물었다. 적어도 다른 아부 예술가들은 독재자의 밝은 면을 홍보하려 했지 서정주처럼 반인륜적 범죄까지 옹호했던 인간은 드물다.
결국 폭압적인 시대 때문에 변절했다는 변명도 사치이며, 서정주가 순수 일본인이었어도 비난받아 마땅한 행보였다. 서정주가 좀 더 유명하고 명성이 있었다면 전범재판에서 반인륜범죄자로 사형당했어도 이상할 게 없는 인간이었다. 이런 반인륜적인 행보 때문에 서정주가 다른 매국노와 차원이 다른 매국노라는 것이며 인간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비난받아 마땅한 인간인 것이다. '시인 서정주'는 분명 대단한 존재이지만, '민족 반역자, 반인륜 범죄자 서정주'가 생전에 저질렀던 짓거리는 백번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그 시절엔 일제가 천년만년 갈 것 같았다는 변명도 궁색하기 짝이 없는 게, 조금만 식견이 있던 사람들은 아낙네 요강까지 전쟁 물자로 징벌하던 시점에서, 늦어도 일본 본토에 폭격기 날아다니던 시점에서 이미 일제의 패망을 예측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저게 변명이 된다고 쳐도, 그럼 광복 후의 군사 정권도 천년만년 갈 거라 생각해서 헌시나 쓴 것인가? 서정주란 인간 자체가 그냥 정치나 시대에 대한 안목은 없었으면서 또 권력의 회유에는 적극적으로 가담한 전형적인 기회주의적인 문인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서정주의 변명이 설득력을 얻을려면 말로만 하지 않고 행적으로 보였어야 했는데 차남 서윤이 가출을 하면서까지 말렸으나 신군부에게도 똑같은 행태를 보였으니 후세의 입장에서는 전형적인 면피성 발언으로밖에 평가할 수 없다.
게다가 서정주는 권력을 매우 밝혔기 때문에, 자기 행적을 자꾸만 합리화하려 들었다. 신군부를 옹호하며 권력 지향적인 행태를 보이고 심지어는 자신의 친일 행위에 대해 언급조차 불쾌해했다는 점은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서정주는 뻔뻔스럽게 자신이 배신했던 한국인의 정서와 문화를 소재로 유명해졌기 때문에, 그의 문학은 기만이라고 비난받는다. 실제로 언론 등에서 자신을 포장하려고 소탈한 문학인(혹은 노인) 이미지를 자주 차용했다.
서정주는 평생 기회주의자였다. 미당의 문장은 한국어의 미학의 극치를 보여주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으로서 서정주는 평소에는 국가나 사회와 같은 거대 담론을 미학적 관점에서나 주절거리고 있다가, 그런 거대한 권력 구조가 조금만 자기 본인의 인생에 영향력을 발휘하면 아예 생리적으로 거기에 꼬리 말고 굴종하기 바빴던 유약하고 비굴한 기회주의자의 전형이었다.
무엇보다 서정주가 다른 친일 예술가와 급이 다른 인간으로 취급받는 이유가 오랫동안 대한민국에서 주요 문인으로 주목받은 점도 있지만 서정주의 행보가 단순 친일을 넘어 카미카제를 옹호하는 반인륜 범죄에 대한 옹호와 미화를 저질렀다는데 있다. 일제강점기 수많은 친일 예술가들이 나타났지만 서정주처럼 카미카제라는 반인륜적 전범행위를 옹호하고 홍보한 인간은 극히 드물었다. 적어도 다른 아부 예술가들은 독재자의 밝은 면을 홍보하려 했지 서정주처럼 반인륜적 범죄까지 옹호했던 인간은 드물다.
결국 폭압적인 시대 때문에 변절했다는 변명도 사치이며, 서정주가 순수 일본인이었어도 비난받아 마땅한 행보였다. 서정주가 좀 더 유명하고 명성이 있었다면 전범재판에서 반인륜범죄자로 사형당했어도 이상할 게 없는 인간이었다. 이런 반인륜적인 행보 때문에 서정주가 다른 매국노와 차원이 다른 매국노라는 것이며 인간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비난받아 마땅한 인간인 것이다. '시인 서정주'는 분명 대단한 존재이지만, '민족 반역자, 반인륜 범죄자 서정주'가 생전에 저질렀던 짓거리는 백번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5. 관련 평론
서정주는 많이 연구된 한국의 시인 중 한 사람으로, 1975년 출간된 「서정주 연구」와 1994년 출간된 「미당 연구」를 비롯해 다종다양한 책이 나왔다. 서정주를 다룬 연구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송욱의 「서정주론」(1953), 김종길의 「의미와 음악」(1964), 김우창의 「한국시의 형이상」(1968)과 「떠돌이의 귀향」(2016), 유종호의 「소리지향과 산문지향」(1994)과 「서라벌과 질마재 사이」(2000), 김인환의 「서정주의 시적 여정」(1972), 천이두의 「지옥과 열반」(1972), 김화영의 「미당 서정주의 시에 대하여」(1984), 이남호의 「겨레의 말, 겨레의 마음」(1994) 등이 있다. 비교적 근래의 저술로는 최현식의 「서정주 시의 근대와 반근대」(2003), 이숭원의 「미당과의 만남」(2013) 등을 들 수 있다. 평자에 따라 서정주와 그의 시를 긍정적으로 보는 경우도 있고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어느 정도 문학 감수성과 심미안이 있는 사람이 서정주의 시를 보면, 현대 한국 시단은 물론이고 한국 문학 전체를 통틀어도 도저히 비슷한 시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큰 감명을 받거나 그 표현력에 압도되는 일이 잦다. 서정주를 숭배하는 사람, 서정주의 후기 작품을 비판하는 사람, 서정주를 싫어하는 사람도 대부분 그 표현 능력만큼은 높이 산다. 이런 독보적 재능이 친일과 친군부, 친독재 따위로 얼룩지지 않고 문학에 오롯이 환원되었더라면 정말로 한국 문단의 큰 자산이자 별이 되었을 것이다. 못내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조적인 사람으로 엮일 만한 인물도 있는데, 바로 소설가 황순원이다. 공교롭게도 서정주와 황순원은 생몰연도가 1915년과 2000년으로 똑같은데, 각각 시와 소설에서 일가를 이루었지만 정치적인 행보에 있어서는 거의 천양지차의 차이를 보여 흥미를 준다. 두 작가의 사후 미당문학상과 황순원문학상이 함께 제정되었으나... 결국 미당문학상은 진보가 다수인 문단의 비판공세를 이기지 못하고고은 미투 논란이 일어나기 직전에 폐지되었다.
어느 정도 문학 감수성과 심미안이 있는 사람이 서정주의 시를 보면, 현대 한국 시단은 물론이고 한국 문학 전체를 통틀어도 도저히 비슷한 시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큰 감명을 받거나 그 표현력에 압도되는 일이 잦다. 서정주를 숭배하는 사람, 서정주의 후기 작품을 비판하는 사람, 서정주를 싫어하는 사람도 대부분 그 표현 능력만큼은 높이 산다. 이런 독보적 재능이 친일과 친군부, 친독재 따위로 얼룩지지 않고 문학에 오롯이 환원되었더라면 정말로 한국 문단의 큰 자산이자 별이 되었을 것이다. 못내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조적인 사람으로 엮일 만한 인물도 있는데, 바로 소설가 황순원이다. 공교롭게도 서정주와 황순원은 생몰연도가 1915년과 2000년으로 똑같은데, 각각 시와 소설에서 일가를 이루었지만 정치적인 행보에 있어서는 거의 천양지차의 차이를 보여 흥미를 준다. 두 작가의 사후 미당문학상과 황순원문학상이 함께 제정되었으나... 결국 미당문학상은 진보가 다수인 문단의 비판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6. 주요 작품
7.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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