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
- 빈가지에 바구니만 매여 두고 내 소녀, 어디 갔느뇨 – 오일도
- 빈가지에 바구니만 매여 두고 내 소녀, 어디 갔느뇨 – 오일도
아조 할 수 없이 되면 고향을 생각한다.
이제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옛날의 모습들. 안개와 같이 스러진 것들의 형상을 불러일으킨다.
귓가에 와서 아스라이 속삭이고는, 스쳐 가는 소리들, 머언 유명幽冥에서처럼 그 소리는 들려오는 것이나, 한 마디도 그 뜻을 알 수는 없다.
다만 느끼는 건 너이들의 숨소리. 소녀여, 어디에들 안재 安在하는지. 너이들의 호흡의 훈짐으로써 다시금 돌아오는 내 청춘을 느낄 따름인 것이다.
소녀여 뭐라고 내게 말하였든 것인가?
오히려 처음과 같은 하눌 우에선 한 마리의 종다리가 가느다란 핏줄을 그리며 구름에 묻혀 흐를 뿐, 오늘도 굳이 닫힌 내 전정前程의 석문 앞에서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는 내 생명의 환희를 이해할 따름인 것이다.
섭섭이와 서운니와 푸접이와 순녜라 하는 네 명의 소녀의 뒤를 따러서, 오후의 산 그리메가 밟히우는 보리밭 새이 언덕길 우에 나는 서서 있었다. 붉고, 푸르고, 흰, 전설 속의 네 개의 바다와 같이 네 소녀는 네 빛깔의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하늘 우에선 아득한 고동 소리. ……순녜가 아르켜 준 상제님의 고동 소리. ……네 명의 소녀는 제마닥 한 개씩의 바구니를 들고, 허기를 굽흐리고, 차라리 무슨 나물을 찾는 것이 아니라 절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씬나물이나 머슴둘레, 그런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머언 머언 고동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었다. 후회와 같은 표정으로 머리를 수그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잡히지 아니하는 것이었다. 발자취 소리를 아주 숨기고 가도, 나에게는 붙잡히지 아니하는 것이었다.
담담히도 오래 가는 내음새를 풍기우며, 머슴둘레 꽃포기가 발길에 채일 뿐, 쌍긋힌 찔레 덤풀이 앞을 가리울 뿐 나보단은 더 빨리 달아나는 것이었다. 나의 부르는 소리가 크면 클수록 더 멀리 더 멀리 달아나는 것이었다.
여긴 오지마……여긴 오지마……
애살포오시 웃음 지으며, 水流와 같이 이 네 개의 수류와 같이 차라리 흘러가는 것이었다.
한 줄기의 추억과 치여든 나의 두 손, 역시 하눌에는 종다리새 한 마리, ―이런 것만 남기고는 조용히 흘러가며 속삭이는 것이었다. 여긴 오지마……여긴 오지마……
소녀여. 내가 가는 날은 돌아오련가. 내가 아조 가는 날은 돌아오련가. 막달라의 마리아처럼 두 눈에는 반가운 눈물로 어리여서, 머리털로 내 손끝을 스치이련가.
그러나 내가 가시에 찔려 아퍼할 때는 네 명의 소녀는 내 곁에 와 서는 것이었따. 내가 찔렛가시나 새금팔에 배혀 아퍼헐 때는, 어머니와 같은 손가락으로 나를 나시우러 오는 것이었다.
손가락 끝에 나의 어린 핏방울을 적시우며, 한 명의 소녀가 걱정을 하면 세 명의 소녀도 걱정을 허며, 그 노오란 꽃송이로 문지르고는, 그 노오란 꽃송이로 문지르고는, 하연 꽃송이로 문지르고는, 빠알간 꽃송이로 문지르고는 하든 나의 상처기는 어쩌면 그리도 잘 낫는 것이었든가.
정해 정해 정도령아
원이 왔다 문열어라.
붉은 꽃을 문지르면
붉은 피가 돌아오고.
푸른 꽃을 문지르면
푸른 숨이 돌아오고.
소녀여. 비가 개인 날은 하늘이 왜 이리도 푸른가. 어데서 쉬는 숨소리기에 이리도 똑똑히 들리이는가.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
몇 포기의 씨거운 멈둘레꽃이 피여있는 낭떠러지 아래 풀밭에 서서, 나는 단 하나의 정령이 되야 내 소녀들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은 역시 나를 지키고 있었든 것이다. 내 속을 내리는 비가 개이기만, 다시 그 언덕길 우에 돌아오기만, 어시 병이 낫기만을, 그 옛날의 보리밭길 우에서 언제나 언제나 기대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아조 가는 날은 돌아오련가?
* 산그리메; 산 그림자
* 멈둘레꽃; 민들레의 방언
<내 늙은 아내>
내 늙은 아내는 아침 저녁으로
내 담배 재떨이를 부시어다 주는데
내가 "야 이건 양귀비 얼굴보다 곱네,
양귀비 얼굴엔 분 때라도 묻었을 텐데?" 하면
꼭 대여섯 살 먹은 계집아이처럼
좋아라고 소리쳐 웃는다
그래 나는 천국이나 극락에 가더라도
그녀와 함께 가볼 생각이다
<무등(無等)을 보며>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山)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靑山)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목숨이 가다 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午後)의 때가 오거든,
내외(內外)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질마재의 노래>
세상 일 고단해서 지칠 때마다
댓잎으로 말아 부는 피리 소리로
앳되고도 싱싱하는 나를 부르는
질마재. 질마재. 고향 질마재.
소나무에 바람 소리 바로 그대로
한숨 쉬다 돌아가신 할머님 마을.
지붕 위에 바가지꽃 그 하얀 웃음
나를 부르네. 나를 부르네.
도라지꽃 모양으로 가서 살리요?
칡넌출 뻗어가듯 가서 살리요?
솔바람에 이 숨결도 포개어 살다
질마재 그 하늘에 푸르를리요?
1915년 전북 고창 선운리에서 태어났다.
보통학교에 들어가기 전 3년간 한학을 배웠으며,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한 뒤 석전 박한영의 권고로 중앙불교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였으며, 같은 해 김동리, 이용희, 오장환 등과 함께 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하여 동인지 활동을 하였다.
1941년 첫 시집 '화사집' 이후 '귀촉도', '서정주 시선', '신라초', '동천', '질마재 신화', '떠돌이의 시', '서으로 가는 달처럼',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 '안 잊히는 일들', '노래', '팔할이 바람', '산시', '미당 서정주 시전집'(전2권), '늙은 떠돌이의 시'를 출간하였다. 위의 시집 외에 '국화 옆에서', '미당 서정주 시전집'이 있으며, 그 밖의 책으로는 시론서 '시문학원론', '시창작교실', '시창작법' 등이 있고, 수필 '미당의 세계유랑기', '안 끝나는 노래', '나의 문학 나의 인생', '내 영혼의 물빛 라일락',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 '안 잊히는 일들', '문학을 공부하는 친구들에게', 소설 '박사 장이소의 산책', 전기 '김좌진장군전', '한국의 현대시', '세계민화집'(전5권), 어린이를 위한 책으로 '서정주 세계민화집' (전5권) 등이 있다.
1954년 예술원 창립회원이 되었고 동국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2000년 12월 24일 향년 86세로 별세,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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