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Arts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

류지미 2023. 12. 26. 12:53

빈가지에 바구니만 매여 두고 내 소녀, 어디 갔느뇨 – 오일도

 

☆  오일도 문학공원~☆ 
 
경북 영양에 "오일도"문학 공원이 있었네요~^ 
 
오일도(1901~1946)는
일본 릿쿄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일제강점기 저항 시인이었다고 하네요~~^ 
 
일도(一島)는 아명이고, 본명은 "오희병(吳熙秉)"입니다~~^ 
 
그가 태어나 자란 이곳 감천마을은

낙안 오씨들이 400여년간 집성촌을 이루며 산 곳입니다~~^ 
 
영양읍내 가까운 이곳은 산이 빙 둘러쳐져 있고
마을 앞으로 하천이 마을을 휘감듯 흘러가는 아름답고 편안한 마을입니다~~^ 
 
시인이나 음악가, 화가들이 태어나 자란 곳은 하나 같이 다 아름다운 환경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내 소녀 
 
빈 가지에 바구니
걸어 놓고 
 
내 소녀 어디 갔느뇨. 
 
박사(薄紗)의 아지랭이
오늘도 가지 앞에
아른 거린다. 
 
☆ 박사(薄紗)는 생견(生絹)으로 얇게 짠 옷감 
 
그의 저서는 일제강점기 한국문학전집과, 노변의 애가 등을 남겼네요~^ 
 
그가 태어난 마을은 감나무가 많아 "감천마을"이라고 불렸다고^ 
 
45년이란 짧은 생을 살다 갔지만

조국의 얼을 잊지 않고 올곧게 산 흔적으로 문학공원이 조성된 것 같습니다~~^

 

 

 

 

미당 시문학관

미당 서정주 시인의 고향이자 영면지인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마을에 세워진 기념관

시인의 고향마을에  마을 뒷산 소요산이 솟아 있고  좌우로  생각와  묘소가 있다.

 

봉암초등학교 선운 분교를 개보수하여 2001년 11월 3일 개관

미당의 중앙고보 재학시절 광주학생의거 지원 시위사건(1929년, 1930년 2회)을 기념

 

문학관이 자랑하는 옥상 전망대에 서면 사방이 한 폭의 그림이다.

정면에는 서해 바닷물과 곰소만 너머로 보이는 변산반도, 뒤로는 소요산과 질마재가 한눈에 들어온다.

발아래로 질마재 마을과 시인의 초가 생가, 맞은편 작은 언덕에 있는 시인의 묘소까지 눈길만 사방으로 돌리면 쉬이 찾을 수 있다.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 있는 서정주의 생가. 복원된 초가 두 채와 흰색 조형물, 시비가 마치 그림책 속 삽화 같다.

 

문학관에서 내려다본 선운리. (仙雲里)

 

 

미당의 시집  <귀촉도>에 실린 시~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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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 서정주

빈 가지에 바구니만 매여 두고 내 소녀, 어디 갔느뇨 - 오일도

아조 할 수 없이 되면 고향을 생각한다.

이제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옛날의 모습들. 안개와 같이 스러진 것들의 형상을 불러일으킨다.

귓가에 와서 아스라히 속삭이고는, 스쳐 가는 소리들. 머언 유명에서처럼 그 소리는 들려오는 것이나, 한 마디도 그 뜻을 알 수는 없다.

다만 느끼는 건 너이들의 숨소리. 소녀여, 어디에들 안재하는지. 너이들의 호흡의 훈짐으로써 다시금 돌아오는 내 청춘을 느낄 따름인 것이다.

소녀여 뭐라고 내게 말하였든 것인가?

오히려 처음과 같은 하늘 우에선 한 마리의 종다리가 가느다란 핏줄을 그리며 구름에 묻혀 흐를 뿐, 오늘도 굳이 닫힌 내 전정의 석문 앞에서 마음대로는 처리할 수 없는 내 생명의 환희를 이해할 따름인 것이다.

섭섭이와 서운니와 푸접이와 순녜라 하는 네 명의 소녀의 뒤를 따러서, 오후의 산 그리메가 밟히우는 보리밭 새이 언덕길 우에 나는 서서 있었다. 붉고, 푸르고, 흰, 전설 속의 네 개의 바다와 같이 네 소녀는 네 빛갈의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하늘 우에선 아득한 고동 소리. ⋯⋯순녜가 아르켜 준 상제님의 고동 소리. ⋯⋯네 명의 소녀는 제마닥 한 개씩의 바구니를 들고, 허리를 굽흐리고, 차라리 무슨 나물을 찾는 것이 아니라 절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씬나물이나 머슴둘레, 그런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머언 머언 고동 소리에 귀를 귀울이고 있는 것이었다. 후회와 같은 표정으로 머리를 수그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잡히지 아니하는 것이었다. 발자취 소리를 아조 숨기고 가도, 나에게는 붙잡히지 아니하는 것이었다.

담담히도 오래 가는 내음새를 풍기우며, 머슴둘레 꽃포기가 발길에 채일 뿐, 쌍긋한 찔레 덤풀이 앞을 가리울 뿐 나보단은 더 빨리 달아나는 것이었다. 나의 부르는 소리가 크면 클수록 더 멀리 더 멀리 달아나는 것이었다.

여긴 오지 마⋯⋯ 여긴 오지 마⋯⋯

애살포오시 웃음 지으며, 수류와 같이 네 개의 수류와 같이 차라리 흘러가는 것이었다.

한 줄기의 추억과 치여든 나의 두 손, 역시 하눌에는 종다리새 한 마리, -이런 것만 남기고는 조용히 흘러가며 속삭이는 것이었다. 여긴 오지 마⋯⋯ 여긴 오지 마⋯⋯

소녀여. 내가 가는 날은 돌아오련가. 내가 아조 가는 날은 돌아오련가. 막달라의 마리아처럼 두 눈에는 반가운 눈물로 어리여서, 머리털로 내 손끝을 스치이련가.

그러나 내가 가시에 찔려 아퍼헐 때는, 네 명의 소녀는 내 곁에 와 서는 것이었다. 내가 찔렛가시나 새금팔에 베혀 아퍼헐 때는, 어머니와 같은 손가락으로 나를 나시우러 오는 것이었다.

손가락 끝에 나의 어린 핏방을 적시우며, 한 명의 소녀가 걱정을 하면 세 명의 소녀도 걱정을 허며, 그 노오란 꽃송이로 문지르고는, 하연 꽃송이로 문지르고는, 빠알간 꽃송이로 문지르고는 하든 나의 상처는 어쩌면 그리도 잘 낫는 것이었든가.

정해정해 정도령아

원이왔다 문열어라.

붉은꽃을 문지르면

붉은피가 돌아오고.

푸른꽃을 문지르면

푸른숨이 돌아오고.

소녀여. 비가 개인 날은 하늘이 왜 이리도 푸른가. 어데서 쉬는 숨소리기에 이리도 똑똑히 들리이는가.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

몇 포기의 씨거운 멈둘레꽃이 피여 있는 낭떠러지 아래 풀밭에 서서, 나는 단 하나의 정령이 되야 내 소녀들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은 역시 나를 지키고 있었든 것이다. 내 속에 내리는 비가 개이기만, 다시 그 언덕길 우에 돌아오기만, 어서 병이 낫기만을, 그 옛날의 보리밭길 우에서 언제나 언제나 기대리고 있었든 것이다.

내가 아조 가는 날은 돌아오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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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에 부제 격으로 오일도 시인의 시 <내 소녀>의 일부가 실려있다.

 

추측컨대  아마 서정주 시인이 오일도 시인의 짧은 시를 읽고 나름대로 감상이 촉발되어 이야기를 붙여서 만든 시가 아닐까 싶다.

 

<내 소녀>에서는 함께 지내던 소녀가 빈 바구니만 놓아 두고 사라진 상황만을 제시한다.

이를 읽고 서정주 시인은 소녀를 네 명의 소녀로 재탄생시키고 화자는 이 소녀들을 뒤쫓지만 붙잡을 수 없는 관계로 재구성한다. 소녀는 화자에게 오지 말라며 만류한다. 화자가 소녀들에게 닿을 수 있는 날을 고대하며 앞으로 나아갈 때 상처를 입는다. 이 순간 소녀들은 화자의 곁에 있다. 소녀들은 화자를 언제나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딜 가지 않고 화자의 마음 속에서 살아 숨쉬고 성장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강렬한 구절이자 순간은  단연코 이 시의 제목이 나오는 순간이다.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

 

 

서정주 詩集 ‘질마재 신화’의 배경… 전북 고창 선운리

고향인 전라도의 일상 언어를

시로 끌어들여 ‘새 영역’ 개척

아무 말이나 붙들고 늘리면 詩

‘부족 방언의 요술사’로 불려

미당시문학관 2001년말 개관

소요산에 안긴 ‘山’모양 건물

단일 문학관으로는 최대 규모

옥상 전망대에선 사방이 그림

미당의 친일행적 끝없는 논란

결국 최종판단은 독자들의 몫

 

서정주의 ‘자화상’은 첫 시집인 ‘화사집(花蛇集)’(1941)에, 그것도 첫머리에 놓인 시이다. 시인은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八割)이 바람이다”라고 외치며 고향을 떠난다.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을 자신에게 물려준 외할아버지가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처럼, 그도 애초에는 고향에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고향은 그저 떠난다고 잊히는 것도 아니며, 돌아올 곳이 없는 사람은 아예 먼 길을 떠나지 않는다. 시인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시집 ‘귀촉도’(1948)의 마지막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아조 할 수 없이 되면 고향을 생각한다./ 이제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옛날의 모습들. 안개와 같이 스러진 것들의 형상(形象)을 불러일으킨다”(‘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 고향은 자신의 처지가 어려울수록 더욱 그립기 마련이다.

 

평생의 화두였던 신라를 넘어 태초의 과거를 찾아서 ‘동천(冬天)’(1968)의 저 높은 하늘까지 내달리던 시인은 환갑이 되던 해인 1975년에 문득 고향으로 돌아왔다. 여섯 번째 시집 ‘질마재 신화’는 어린 시절의 삶과 기억을 바탕으로 개인적 추억들과 고향 마을에서 대를 이어 전해지는 옛이야기들을 산문시로 엮은 것이다. 인간으로서 끝내는 되돌아가야 할 고향과 그 원초적 삶을 그리며, 오랫동안 찾지 않은 고향과 여전히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바친 시인의 헌사이다. 이 시집을 미당의 대표작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때가 서정주의 길고 변화 많은 시력(詩歷)에 있어 중요한 고빗길이었음은 분명하다. ‘질마재 신화’ 이후에 시인은 다시금 ‘떠돌이’를 자처하고, 아예 자신의 시를 ‘떠돌이의 시’(1976)라고 이름 짓는다. 만년에 이르러서도 마지막 두 시집 ‘늙은 떠돌이의 시’(1993)와 ‘80 소년 떠돌이의 시’(1997)에 어김없이 이 단어를 제목에 새겼다. 세상 끝까지 평생 내달렸던 시인은 결국 죽어서야 고향에 돌아왔다.

 

서정주는 2000년 눈이 많이 내린 성탄절 전야에 이 세상을 떠났고, 고스란히 20세기의 시인으로 남았다. 시인으로서의 그를 평가하는 일은 전적으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다. 시의 아름다움으로 삶의 오점을 덮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서정주의 잘못된 처신으로 그의 시 전체를 폄하할 수도 없다. 진실과 상식이 필요하다. 부끄러운 역사도 분명 역사의 일부분이며 결국 지워질 수도 없고 끝내 제외될 수도 없다. 공정하고 균형 잡힌 평가가 필요하다. 문학관의 공간 하나를 온전히 미당의 친일 작품 전시에 선뜻 할애하고, 서정주의 서울 집(관악구 남부순환로 256나길 4, 남현동)의 시인 연보(年譜)에도 ‘친일 행적’을 분명히 드러내 밝히고 있다. 옳은 시작이다.

 

몇해 전 늦가을, 처음으로 선운리를 찾았을 때의 기억 하나. 고창의 지역 축제가 한창이었고, 서정주의 호를 그 이름에 붙인 문학상의 시상식과 미당을 비난하는 시위가 지천으로 활짝 피어난 국화꽃 무더기를 사이에 두고 동시에 진행 중이었다. 이 광경을 가만 보고 있자니, 부모를 따라온 아이들에게 괜히 미안하고, 하다못해 국화꽃 보기에도 민망스러웠다.

 

작년에는 드디어 ‘미당 서정주 전집’이 스무 권으로 완간됐다. 한 대가(大家)의 모든 작품을 “하나도 빠짐없이” 집대성하는 작업은 비단 그 개인뿐만 아니라 한국 문학사에도 분명 뜻깊은 일이다. 하지만 곧바로 해묵은 논쟁이 다시 시작됐다. 늘 논란이 됐던 시 몇 편을 “미당 생전에 시집으로 묶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록하지 않고, 그저 작품연보에 제목만 올렸기 때문이다. 안타깝다. 미당을 누구보다 잘 알고 사랑해 온 이 전집의 편자들은 유념했어야 했다. 얼룩이 있는 도자기는 얼마든지 보물이 될 수 있지만, 그 흠집들을 억지로 없애려고 그 자리에 구멍을 내버리면 아예 그 가치를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