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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함산 석굴암(吐含山石窟庵) 석굴(국보제24호)

류지미 2024. 3. 29. 06:03

세계  유일  인공 석굴암 석굴(경주시)

 

 

 

석굴암 석굴(국보제24호)

 

 

 

이 석굴은 동해가 바라보이는 경주의 토함산 중턱 동쪽 능선에 동남향하여 조영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중국이나

인도의 석굴사원이 석회암이나 사암질의 자연 암반을 굴착하여 조영되는 반하여 석굴암은 여러 형태의 석재를

서로 짜맞추어 인공적으로 조립한 석굴이다 옛기록에는 이러한 구조적 특징을 "직조석감"이라 표현하고

있으며 창건 당시의 절 이름은 석불사로 기록되어 있다

 

 

 

이 석굴은 여러가지의 불전을 하나의 석굴안에 축약시켜 절묘한 균형감각으로 분할 배치한 고도의 절제된 수준을 보여주고있다

평면구조는 방형의 전실과 원형을 이룬 후실로 연결된 전방 후원형인데 전실의 좌으 양벽에는 각각 4구의 팔부중상을 양각하고

그 아래에는 안상이 새겨진 대석이 받쳐져 있다

 

 

그리고 주실로 이어지는 비도의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좌우에 조각하고 좌우 벽에는 각각 2구씩 사천왕상을 배치하여 주실의 불

보살의 세계와 구분짓고 있다 주실은 궁륭형의 석실에 봉토를 덮은 구조로 중앙에서 약간 뒤로 치우쳐 항마촉지인을

취한 본존여래상이 연화대좌위에 결가부좌하고 있다

 

 8세기 중엽 신라 불교미술의 절정기를 대표하는 이 불상은 당당하고 균형잡힌 체구와 풍만한 얼굴이 종교적 신비감으로 충만해 있다

주실의 벽은 입구에서 좌우로 제석, 범천, 문수, 보현보살 및 10대 제자상을 차례로 조각하고 본존불의 후면에는 십일면과음보살을 주벽

의 중앙에 배치하였다

 

 

 관음상의 상부에는 원형 연화석을 삽입하여 본존불의 두광으로 삼고 그 좌우로 10개의 감실을 설치하여 보살상과 거사상을 안치

하였는데 입구쪽의 2구는 일제 강점기에 유실되어 행방을 알 수 없다

 

 

 삼국유사에 김대성이 전세의 부모를 위하여 창건했다고 전하는 석굴암은 신라 예술의 극치이자 동양 불교미술의 정점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예술적 가치로 인해 1995년 12월 불국사와더불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경주 토함산 석굴암  

吐含山 石窟庵

 

吐含山石窟庵 일주문(경주시 진현동)

 

 

토함산 정상에서 동해를 바라보 았다는 석굴암을 어디쯤일까 .

석굴암은 정상에서 남동쪽 방향 능선 하나를 넘어 있다. 석굴암 광장에서 석굴암까지 0,6km 왕복 1,2km이다. 

  

일주문을 지나 산모퉁이를 세 차례 돌며 철쭉, 산죽, 참나무, 소나무 숲을 지난다. 

 

석굴암 요사체 전경

 

석굴암은 통일신라 751년(경덕왕 10)에 착공하여 774년(혜공왕 10)에 완공,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金大成)이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건립하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석굴암)를 건립했다는 일연의 삼국유사 기록이다.  

 

석굴암 전경 (국보 제24호)은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다.

삼국유사 이후 기록이 없다가 조선에 들어와 1703년(숙종 29) 종열(從悅)이가 석굴암 돌계단을 쌓고 중수하고 1718

년 영조 34) 대겸(大謙)이 석굴암 석굴 중수하다(佛國寺古今創記). 조선말기 울산병사 조예상(趙禮相)이 석굴암 전실

전각을 중창하다.   

 

석굴암 안내

국보 제24호이며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석굴암은 삼국유사 이후 기록이 없다가 조선에 들

어와 1703년(숙종 29) 종열(從悅)이가 석굴암 돌계단을 쌓고 중수하고 1718년 영조 34) 대겸(大謙)이 석굴암 석굴

중수하다(佛國寺古今創記). 조선말기 울산병사 조예상(趙禮相)이 석굴암 전실 전각을 중창하다란 기록이 있다.  

 

석굴암 석물

 

석굴암 돌계단

 

▶석굴암 전실(2021년)

 

▶겸재 정선(謙齊 鄭敾 1676~1759)의 嬌南名勝帖에 실린 '慶州 骨窟石窟'

 

▶석굴암 최초 사진 (1909년)

조선 총독부 부통감에 의해 최초의 석굴암 사진 제작

 

▶석굴암(1909년)

일제 때 3차례 보수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본존불을 제외한 모든 초석이 교체되다.

 

▶석굴암 전실(1962~1964년)

정부 문화재 관리국의 보수공사 완료 후 오늘에 이르다.

 

▶석굴암(2021년)

현재 석굴암 내부는 관람시 항온항습 등의 문제로 유리벽 밖에서 관람을 실시하고 있다. 

 

▶석굴암 석감평면도

 

東海를 바라본다. 해는 어디서 뜰까? 부처님 미간의 백호(白毫)가 일출을 받아 과연 빛을 發할까? 어릴 때 들은 얘기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서야 아는구나.

   

壽光殿

 

수광전 본존불 아미타여래

 

수광전 석등

 

불국사화강암은 불국사를 비롯한 경주 신라 유적지의 각종 석물 재료로 사용되었다.

 

요사체 구역

 

기념품 가게 안에 석굴암 본존불의 액자 사진이 걸려있고 그아래 촬영 금지라고 쓰여있어 왜 사진을 못 찍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초상권 침해"라고 답한다. "그럼 부처님은 안 계시는데 누구에게 초상권이 있느냐"라고 제차 묻자  "절에 있

다" 고 한다. 하는 수 없이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복제 가능한 사진을 구할 수밖에... 

 

나가는 길

 

일주문을 나서며

석굴암을 대할 때마다 불편한 진실이 떠오른다. 천 년 신라를 상징하는 문화재가 조선에 들어와 숭유억불 정책으로 허

물어진 상태로 방치되었다가 일제에 의해 발굴이 되어 3차례 보수공사가 이루어지고 박정희 정부 문화재관리국이 전면

재보수를 실시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며 그들을 위대한 문화유산을 지켜온 선조들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역사 논쟁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이다. 당시로선 최선을 다한 일이므로 석굴암의 훼손, 방치,보수 등에서 발생한 사건들도 역사의 한 귀절이다.

 

하루속히 석굴암 문을 열고 유리벽을 걷어내어 햇빛이 부처님 미간을 밝히는 가운데 복도를 따라 걸으며 참배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학수고대해본다.